좋은 말씀/신현수:조직신학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97)

새벽지기1 2016. 7. 27. 07:30


둘째, 죄에는 필연적으로 죄책감이 따르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곧 죄책감을 없애버리는 것을 설명하지 않고 그것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죄는 자유와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가설이다, 왜냐하면 도덕 행위는 실제적 선택의 의미에서 볼 때 자유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책임과 자유는 도덕성을 가진 인격의 본질이다. 그러나 사람이 자유로운 존재라면 책임의 요소를 없애버리지 않고서는 어떤 과학의 공식으로도 죄의 보편성을 나타낼 수 없다.


만일 죄가 비록 보편적이지만 그것을 자연적인 사실이 아니라 도덕적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설명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보편적인  도덕적 사실이 무엇 때문에 생겨났는지를 결정하면 그것은 이미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경험적 사실의 차원에서 죄의 원인을 밝혀내려는 시도는 사람이 의지를 가지고 있고 인격적인 존재라는 것을 쓸 데 없는 것으로 만든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의 의지는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이성으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다.


셋째, 사람의 본성이 지니고 있는 치유 받아야 할 영원한 상처는 어떤 생물학이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깊다. 죄가 갖고 있는 중심적이고 전형적이며 피할 수 없는 모습은 교만이다. 교만이나 자기 사랑은 죄가 갖고 있는 특성이다. 동물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본능은 살아남으려는 의지다. 하지만 사람의 죄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없다. 사람의 죄는 권력의 의지다. 이것이 사람을 동물과 구별시킨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인류의 역사가 비참한 불일치에 이르렀다.
이기심이 세상의 비극을 초래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와 요구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 교만이 모든 죄와 허물의 바탕이다.


그러면 타락의 교리가 무엇인가? 죄를 깊이 있게 살피면 풀 수 없는 이율배반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보편적인 경험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실제로 피할 수 없다. 도덕적인 눈으로 보면, 그것은 인격적인 결정이자 책임의 문제다. 달리 말하면, 죄는 내면 깊숙이 있는 기질에 뿌리내리고 있다. 하지만 죄는 의심의 여지없이 사람의 의지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곧 어떻게 결정주의의 위험에 빠지지 않으면서 비자유의 개념을 도출해낼 수 있는가?


기독교 교리는 사람이 갖고 있는 본래의 상태와 타락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풀려고 시도했다. 그것은 죄의 역사를 불가피성의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가령, 종교 개혁가 루터는 사람의 원시 상태가 완벽했다고 보았다.          
사람이 지음 받은 하나님의 형상은 땅을 다스리는 것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셨다. 그런데 사람이 땅을 다스린다는 것은 사람의 문화 활동을 말한다. 이 문화 활동의 본질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 활동의 한 모습이 경제생활이다. 재물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쓰라고 맡기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죄를 지음으로써 재물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채우는 목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사람이면 누구나 부유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람은 재산을 모으는 일에 평생을 바친다. 부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산이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고 있다. 연봉이 좋은 직장인가 아닌가를 결정한다. 재산이 편리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재산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