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으며 죄의 무게에 의해 짓눌린 인류에게 어떤 삶의 의미가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미래를 낙관하거나 인류가 스스로의 힘으로 멸망의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믿을 수 없다. 인류가 근본적으로 제정신이 아니고 그 영이 그 어떤 것으로도 손상될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말 할 것 없이, 인류는 위대한 과학적 성과를 이룰 수 있고, 문학이나 예술에서 빛나는 업적을 낼 수 있으며, 문화 문명을 놀랍게 발전시킬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죄와 악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인류의 역사는 점진적인 발전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인류는 원시시대보다 이상 세계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다. 사람은 완전에 이르기 위해 갖은 애를 쓰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악이 생겨나게 하였다.
따라서 인류는 실패와 파멸을 피할 수 없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인류가 놓인 상황을 바르게 할 수 없다. 이러한 상태를 신학은 ‘전적 부패’라고 일컫는다. 사람은 실제로 악하다. 하나님 형상은 전적으로 그리고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었다. 사람은 선을 행하기를 싫어할 뿐만 아니라 행할 능력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엄연한 죄의 현실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주실 것과 악의 세력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그것을 물리쳐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기꺼이 믿을 수 있다. 믿음은 하나님이 여전히 그의 백성을 사랑하고 돌아보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깊숙이 찾아 오셔서 죄를 드러내주실 뿐만 아니라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세상의 어두움은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구속의 행위를 통해 사랑의 빛으로 빛나게 되었다. 하나님 자신은 사람이 영원한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는 운명에서 구원해주셨다.
이러한 성경의 진리를 아는 것이 모든 형태의 선교 사역과 복음 전도 활동의 원천이다. 사람은 지은 죄 때문에 멸망을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은 복음 메시지의 능력으로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다. 아무리 타락한 사람이라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만 하면 그에게는 새 생명이 있다.
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죄는 용서받을 수 있고, 죄의 세력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강력한 힘으로 깨뜨릴 수 있으며, 죄의 책임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이사야 1:18). 여기서 눈은 전쟁터의 끔직한 모습을 덮개로 가릴 수 있고, 도시의 더러운 모습을 가려 아름답게 보이게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의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깨끗하게 하는 것 곧 하나님이 사람의 죄를 영원토록 가리는 은혜를 상징한다.
사람은 비록 하나님의 뜻을 어긴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가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성품은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멀리 떠나 비참한 상태에 빠졌으나 여전히 사랑을 받는 아들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고 타락했을 때 경험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의 형태는 하나님의 진노다. 사람은 지음 받은 자로서의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께 대한 의무를 갖게 되었다. 자유가 속박이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율법의 저주’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은 더 이상 생명을 값없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불러오는 요구가 되었다.
신학적 인간론의 중요한 세 번째 원리는 악의 연대성이다. ‘죄’는 우선적으로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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