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언제나 한 개인이 의식적이고 책임 있는 의지의 행위다. 죄는 또한 우리가 경험하는 죄스러운 상태나 조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결코 한 사람의 사적인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서로 얽혀서 유기적인 악의 체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죄의 이러한 연대적 국면을 어거스틴은 ‘죄 있는 다수’(massa peccatrix)로 표현하였고,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는 ‘각 사람에게 모두의 일이, 모든 사람에게 각 사람의 일이 있다’고 말하였으며, 러시아의 문호 도스트예프스키는 ‘우리 각자는 우리가 지은 모든 행위에 대해 모든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로 나타내었다.
오늘날 이른바 ‘집단 무의식’에 관한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개인의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삶 아래에 드러나지 않으나 타고난 깊은 힘의 층이 있다. 그것의 내용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고, 그러한 것으로서 의식적인 의지의 통제를 넘어간다.
신약성경은 인류가 악의 세력에 지배되거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지배력이 너무나 사악하고 교활하며 강력하기 때문에 그것을 신약성경은 마귀의 세력이란 말로 나타낸다. 악을 사탄으로 인격화하는 것은 우리가 피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영적인 악의 연대가 있음을 나타내준다. 우리가 그것을 어떠한 형상으로 표현하든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에는 악의 왕국이 있다. 바로 그것에 의해 각 개인은 악한 행위를 하도록 부추김을 당하고 더욱 강도 높은 악행을 지속적으로 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사람과 그의 죄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원리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남은 문제는 죄의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죄란 사람이 동물의 기원에서 진화론적으로 살아남는 것에서 생긴 것이라고 주장한다. 죄는 동물적 유전 형질의 부분인 충동과 본능적인 욕망을 의식적으로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것이다. 죄를 짓도록 자극하는 이러한 원초적인 것들은 그 자체로서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다. 그것들은 사람으로서 생물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성장하는 데에 필요하다. 그것들은 도덕적인 삶의 원 재료가 되며, 그러한 것으로서 악 뿐만 아니라 덕의 조건과 근거가 된다.
동물은 죄를 지을 수 없고 또한 거룩함을 이룰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은 도덕을 행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고 거룩함에 이를 수 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타고난 성향은 도덕적으로 중립이지만 그러한 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의지는 그렇지 않다. 사람이 가진 의지는 선하거나 악한 것일 수 있다.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은 단지 도덕적으로 인정을 받거나 비난을 받는다. 사람이 갖고 있는 타고난 성향은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사람이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동물로부터 책임 있는 도덕적 존재로 발전함에 따라 죄가 발생하는 조건과 원인이 된다.
이러한 견해는 다음과 같은 어려움을 피할 수 없다. 첫째, 어째서 죄가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가? 진화론적 이론이 죄가 어떻게 생기는지를 설명해준다고 하더라도 왜 죄가 언제나 어디서나 생기는가? 세상 어디에서든지 죄가 있는 현상을 찾아볼 수 있게 하는 인간 의지의 타락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도덕 행위의 조건으로서 사람은 악을 택할 수 있는 자유를 틀림없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 죄의 경향이 사람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성품의 부분이 아니라면, 왜 사람은 누구도 예외 없이 악을 행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전통적 신학의 접근은 이른바 ‘원죄’ 혹은 ‘근원적 죄의식’이다. 특히 뒤의 것은 법정의 그리고 형벌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개인주의의 윤리에서는 사람이 갖는 기본 도덕의식에 맞지 않다. 사람은 누구도 조상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죄의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으로 비난받을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한 판단은 도덕성의 의미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다.<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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