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보면 고난을 해결하는 법이나 복을 받는 법이나 같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법도대로 사는 것이다.
고난이 왜 오느냐? 이 복 받는 길로 가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입술로만 경외하고 마음으로는 경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의 법도대로 살지 않고 세상의 법도대로 살기 때문에 고난이 온다.
이 두 가지를 확실히 살게 하시기 위해서 광야 고난의 훈련을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을 해결하고 고난의 훈련을 빨리 마치고 복을 받는 길은
역시나 그분을 확실히 경외하고 그분의 법도를 지켜 행하는 것이다.
복을 받는 법도, 고난을 해결하는 법도, 이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복을 받기 위해, 이 일에 헌신하지도 않고,
고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 방법으로 돌아오지도 않는다.
그저 일을 통해서 사람을 통해서 복을 만들고 쌓을려고 한다.
그저 일을 통해서 사람을 통해서 고난을 해결하고 극복하려고 한다.
복이 오는 것도, 고난이 오는 것도, 한 코스이다.
그분을 경외하며 그분의 법도대로 살면 복이 오고, 살지 않으면 고난이 온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익히 아는 말씀이지만 잊어버리기 쉽고 기억하여 행하기는 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고 복을 받는 길로 가십시다.
사도가 우리에게 간절히 원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는 것,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것. ‘동일한 부지런’이 뭔가요? 꾸준한 부지런이지요.
몇 번 하다가 말아버리는 것이 아니고, 꾸준한 부지런을 나타내라고 한다.
뭐에 대한 부지런인지는 그 위에 10절에 나와 있다.
행위와 섬기는 것에 대해서이다.
행위에 대해서는 7-8절에 나와 있다.
(히6:7-8)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자주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비를 흡수하여 합당한 행위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행위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으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하신다.
그렇지 않고 가시와 엉겅퀴의 열매를 내면 고난과 저주와 불사름이 온다고 하신다.
섬기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나타낸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위의 열매를 맺는 일과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랑으로 성도를 섬기는 일에
꾸준히 부지런하라는 것이다.
무엇에 대한 부지런인가가 중요하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면서, 악인의 형통을 위해서 부지런한 것은 고난과 재앙을 속히 크게 불러올 뿐이다.
나의 탐욕과 야망을 위한 부지런은 하나님의 축복을 결코 이루지 못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위와 섬김의 열매를 맺기 위한 부지런이어야 한다.
또 사도가 우리에게 간절히 원하는 것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어떤 환경과 고난과 시련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날까지
복과 약속에 대한 소망을 풍성하게 꽉 잡고 흔들리지 않는 것 아니겠어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고 하셨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가리켜 맹세하여 약속하셨다.
이 아브라함의 복은 바로 우리 각 개인이 받을 복이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은 이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갈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려 함이라
맹세는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으로 하는 것이다.
이 복의 약속이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맹세와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에 의해 보증된다.
하나님은 그 뜻을 변할 수 없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다는 이 소망은 확실한 것이다.
하나님이 맹세로 보증하셨고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이 보장한다.
우리의 복과 번성에 대한 소망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준다.
그 소망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다.
그 소망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고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게 해준다.
끝까지 이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시기를 축원한다.
동일한 부지런과 소망의 풍성함을 이루는 방법으로 사도는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이다.
복을 받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덕목이기도 하다.
고난이 오는 것도 이 세 가지 덕목을 갖추지 못해서이기도 하다.
(고난을 해결하는 방법도 이 세가지 덕목에 있다고 할 것이다.)
1.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이루어주시기까지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주어진 작은 일에 충성하며 미래를 준비하며 게으르지 않는 것이다. 게으름은 패가망신을 가져오는 것이다.
가난과 궁핍을 강도같이 군대같이 몰고 오는 것이 게으름이다.
(잠 6:6-11)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잠 24:30-34)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왜 게을러지는가?
약속에 대한 소망의 풍성함이 없기 때문이다.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확실히 있는 사람은 게으르지 아니한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에 맥을 놓고 ‘될대로 되라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맹세와 속성으로 보장하고 보증하신 복과 번성을 내 소망으로 가져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가나안의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음에도,
그 많은 기적과 은혜를 체험하고서도, 믿지를 못하고 소망으로 붙들지 못해서 망했다.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소망이 내 영혼의 닻이 되도록 해야 한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파도가 뛰놀아도 닻이 확실히 내려져 있으면 견고하고 흔들림이 없다.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한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2. 믿어야 한다.
복의 약속과 이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믿음은 그분이 살아계신 것과 그분이 복주시는 분임을 믿는 것이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의 법도가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믿음을 쉽게 놓아 버린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하고 그분의 법도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
알아야 믿음이 생긴다. 믿음은 말씀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내 의지와 결심으로 오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관념일 뿐이다.
그것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쉽게 흔들리고 정함이 없고 작심삼일의 것이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도, 그분의 약속의 복을 아는 것도, 그분의 법도를 아는 것도
순수한 말씀을 통해서 알아야 한다.
청교도들이 그 많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어떻게 굳건한 믿음을 견지할 수 있었느냐?
그들은 말씀을 알고 말씀을 믿고 그 순수한 말씀 위에 견고하게 섰기 때문이다.
그들을 본받아 우리도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위에 우리의 믿음을 세워야 한다.
말씀을 모르면 자기 좋을 대로 자기 편할 대로 살게 돼 있다.
말씀을 알더라도 인간의 지식으로 혼잡하여 왜곡하면 믿음과 삶이 왜곡하게 된다.
요 근래 청교도들의 책을 읽으면서 오늘날 보수주의라고 하는 복음주의도
얼마나 말씀을 혼잡하고 있는지를 알고서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왜 근래 100여년 동안 가짜 부흥들은 많아도 진짜 부흥이 없는지를 설명해 준다.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은 순수한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그때부터 청교도들의 시대인 17, 18세기에 많은 부흥을 주셨고,
19세기, 20세기 초까지도 순수한 말씀 위에 하나님은 놀라운 부흥을 주셨다.
그러나 19세기말부터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휴메니즘 지식의 홍수로 인하여
말씀의 혼잡이 일어났고 하나님의 기적을 보기 어렵게 되었고 그것이 교회를 부패시켰다.
그래서 다시 청교도신앙으로 개혁과 부흥이 일어나야 한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말씀이 순수해야 믿음이 순수해지고 진짜 부흥과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된다.
(고후2: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말씀을 왜곡하여 다른 복음을 전하게 되면 가짜 부흥이 판을 치고 저주를 받게 된다.
(갈1:7-8)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지금의 요란함과 청교도시대의 부흥을 비교해보면 가짜인 것이 분명해진다.
회심은 없고 현상과 표적만 요란하다. 미국 남미 아프리카의 부흥들이 의심스럽다.
청교도시대의 부흥을 다루는 책들에도 옥석이 있음을 분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혼잡한 말씀의 시각으로 쓰여진 책들이 많다.)
저도 이제까지 배우고 가르쳤던 자료들을 가지고 살면 편하고 좋다.
그렇지만 모를 때는 그럴 수 있었어도 알고서는 그렇게 더 이상 살 수 없다.
그래서 힘들더라도 다시 공부하며 정리하며 바르고 순수한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이다.
순수한 말씀에 입각해서 바른 믿음의 길을 갈 때만 하나님은 복과 부흥을 주셨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행위와 섬김도 순수한 말씀과 믿음의 열매들이다.
이 열매들을 맺기에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라는 것이다.
혼잡하지 아니한 순수한 말씀 위에 우리의 믿음을 재건하자.
우리가 근래 100여년 동안 말씀을 혼잡한 것에 익숙하여서
순수한 말씀으로 바꾸기가 쉽지 않다.
변화라는 것은 고통스런 작업이다.
그러나 그것을 통하여 복과 번성이 온다면 우리는 힘들더라도 그 길을 가야할 것이다.
순수한 말씀, 순수한 믿음 위에 복과 번성이 온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란다.
이와 함께 우리 몸과 마음에 배어있는 사고방식과 세상적인 가치관을
순수한 말씀의 그것으로 바꾸는 작업을 우리는 병행해야만 한다.
광야의 고난과 훈련의 목적은 우리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말씀의 방식으로 바꾸는 데 있다.
3. 오래 참아야 한다.
오래 참음은 그분이 약속한 복을 이루시기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서두르면 안 된다. 조급해도 안 된다.
하나님의 법도에는 ‘빨리빨리!’라는 것이 없다.
40년을 기다리고 25년을 기다리고 10여년을 기다리고 수년을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다.
고난이 왜 오느냐?
하나님의 손을 기다리지 못하고 서둘러 조급하게 이룰려고 하는 데서 온다.
하나님의 계획과는 상관 없이 사람의 계획을 이룰려고 하는 데서 온다.
저도 주 안에 돌아와서 서두르고 달음질 치던 세월을 보내고 여기에 와서야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햇수로 10년,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손놓고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게으르지 않고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을 가지고서 오래 참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과 인도가 분명하다고 확신이 오면 그 일에 헌신하는 것이다.
그 작은 일을 하면서도 서두르지 않고 조급해 하지 않고 주시는 만큼 인도하시는 만큼 한다.
불기둥 구름기둥 따라 움직이고 머물기를 힘쓴다.
내일 일은 우리가 알 수 없다. 내일 일을 염려할 필요도 없다.
오늘 내게 주어진 일에, 확신을 주는 일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축복의 때, 영광의 때, 머리를 들게 하시는 때를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고,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는 때를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 소망을 내 영혼의 닻같이 여기고 그 소망을 푯대 삼아 그 소망의 풍성함으로
오늘을 충실히 살면서 게으르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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