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이라도 살아남자는 ‘생존’이 한국사회의 키워드”라고 한다.
노르웨이 사람으로 한국에 귀화하여 교수하다가 노르웨이 국립 오슬로대학 교수로 있는 박노자의 말이다. “노르웨이의 키워드는 즐거움이예요. 나쁜 감정을 안 쌓고 다들 즐겁게 살려고 해요. 사회구조도 그렇게 짜여져 있습니다. 한국의 키워드는 하나밖에 없어요. 생존 뿐예요. 나만이라도 살아남는 거죠. 정도 차이는 있지만 러시아도 결국 생존인 것 같아요.”
살아 남기 위해서는 내 자신 무슨 짓을 해도 되고, 나라가 어찌되든 그것만 보장해 준다면 된다는 거죠. 군부 독재를 통해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니까, 독재를 하고 민주주의가 후퇴하더라도 경제만 살리면 된다고 하는 사고방식이, 현재의 정권을 탄생시켰죠.
지난 정권은 너무 좌로 틀어서 무능하더니 이번 정권은 너무 우로 틀어서 과능하다.
4대강이다 개발이다 하고 밀어붙이고 있다.
국민과의 소통은 상관없이 마이웨이 일방통행을 질주하고 있다.
저걸 누가 멈추게 할 수 있을런지 딱하기만 하다.
박노자교수는 이 정권 하는 게 북한을 연상케 한다고도 했어요.
국제적 망신을 사면서도 못할 일을 많이 한다는 거지요.
나만 살아남을려고 하면 될 거 같지만 그게 되지를 않는다. 다 죽는 길로 가고만다.
사회가 바로 서고 안정망이 되어줘야 개인의 생존도 즐겁게 보장이 되는 법이다.
이 간단한 이치가 통하지 않는 게 이 나라의 불행이고 비극이다.
사회는 나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설 때 그 사회도 바로 선다.
뭘로 바로 서나요? 원칙과 법도로 서야 한다.
도가 아니면 가지를 말고, 원칙이 아니면 살지 않는 훈련을 해야 한다.
가정에 도가 없고 원칙이 없는데도, 힘이 정의가 되고, 고집과 편견이 원칙으로 행세하는 데도, 죄가 왕노릇하는 데도, 혼신의 힘을 다해 그 도와 원칙을 세울려고 하질 않고 마냥 손을 놓고 무너지고 황폐해지도록 흘러만 가서는 안될 일이다.
경제가 돈이 우리를 살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도와 원칙이 우리를 살리고 그것이 풍성한 돈과 경제를 낳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 모든 것이 더해지는 것이다.
사람은 이 도와 원칙으로 살도록 가정과 사회에서 못 가르치고 안 가르치고 있다.
사람은 가만 두면 도와 원칙을 살지 않는다.
그래서 신명기 6장의 말씀이 필요하다.
(신6:6-9)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 도를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의 훈련을 시키시는 것이다.
(시66:9-12)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하나님의 도를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은을 단련함같이 우리를 시험하시고 단련하신다.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도 하시고,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시기도 하신다.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도 하신다.
이렇게 불같은 고난, 물같은 고난을 통과하고 나면, 은처럼 단련이 되면,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신다.
그런데 우리가 겪는 고난이 다 은을 단련하는 고난은 아니다.
(벧전2:19-21)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부당하게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결코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내 신세를 한탄하며 무능하게 손을 놓고 참는다면 그것은 결코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죄가 왕노릇해서 오는 매를 맞고 참는 것은 칭찬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고 참을 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다.
선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이다.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내 인생을 내 가정을 하나님의 도를 따라 바로 세우고자 할 때 겪는 고난이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도 돌아가신 부모나 옛 애인을 생각하듯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분은 그분의 뜻과 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분이시다.
감상적으로 하나님을 죽은 부모처럼 옛애인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 분의 뜻을 생각하면서 슬픔을 참을 때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 주님은 그 고난의 본을 보이시고 우리로 그 발자취를 따라오라고 하신다.
그 발자취를 따라가야 한다. 거기에 승리와 영광이 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부르심 받았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 되었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주님의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우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도를 세우기 위해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을지라도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보배로운 산 돌로 신령한 집을 세우라는 것이다.
그 산 돌을 하나님은 시온의 모퉁이돌로 사용하실 것이다.
세상의 건축자들은 쓸모없다고 버렸지만 하나님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신다.
쓸모없는 돌로 여기고 무시하던 그들은 이 돌에 부딪치고 걸려 넘어지게 된다.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리라
그들이 그렇게 되는 것은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정해진 운명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버림 받는 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람을 두려워할 때 그들은 그들의 악행과 폭정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산 돌이 되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그들은 무릎을 꿇던지 떠나가든지 하게 된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 것이 하나님의 도이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니 사는 것같이 한 번도 살지를 못한다.
산 돌로 살 때의 고난을 두려워하니 악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우리는 주님의 진리로 자유해야 한다. 경제의 노예가 되는 한 우리는 자유할 수 없다.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살아남는 생존이 키워드가 되고 그것에 안주하는 한 오히려 죽어갈 수 밖에 없다.
죄와 사망은 더욱 기승하여 왕노릇하고 삶은 더욱 피폐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진리가 주는 자유로 삶을 세우지 않으면, 은혜가 의로 왕노릇하도록 삶을 세우지 않으면
죄와 사망의 왕노릇은 제어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다.
주님의 진리만이 노예의 멍에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을지라도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산 돌이 되려면,
그래서 신령한 집으로 나의 삶을 세울려면,
우리는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한다.
믿음과 용기는 오직 주님의 진리의 말씀으로부터만 진정 생기고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갖난 아기들이 젖을 사모하듯,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해 하듯,
순전하고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거기에 우리의 살 길이 있고 우리의 소망이 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자에게 형통한 길이 약속되어 있다.
악인의 꾀를 쫓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은 형통의 복을 주신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기 보다는 세상의 걱정거리들을 가까이 한다.
그러면 점점 그 걱정거리들의 늪에 깊이 깊이 빠지고 마는데도 말이다.
사람과 세상을 심으면 흑암과 재앙을 거두고 하나님과 진리를 심으면 밝은 아침과 복을 거둔다.
저녁은 가고 아침이 되는 창조의 역사를 이룬다.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지나가는 안개와 같다. 나그네와 행인 같은 인생이다.
(벧전2: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해가 저물고 이 세상을 떠날 날이 되어 비참한 내 인생을 돌아보며 후회해도 때는 늦으리다.
더 늦어지기 전에 내 삶의 우선 순위를 바꾸고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기 바란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다.
말씀은, 세상 지혜와 지식들로, 악인들의 꾀로, 혼잡하지 않아야 한다.
(고후2: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경계해야 한다.
골2:6-8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지금 기독교 서점에서 인기리에 팔리고 있는 대부분의 책들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 아니고
철학과 헛된 속임수의 책들인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교훈만을 따라야 한다.
사람들의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말씀을 혼잡해 놓은 것들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교훈을 따라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그 안에서 행하도록 가르쳤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화하면서 순수한 말씀은 이교적인 사상들로 혼합되기 시작했다.
1,200년이 지나 루터와 칼빈같은 개혁가들에 의해 다시 순수한 말씀으로 돌아섰고
그 개혁을 삶의 현장에 완성한 사람들이 청교도들이다.
그러나 19세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200여년 동안 다시 세상의 철학과 초등학문들이
교회 안에 밀려 들어와 복음 행세를 하고 ‘사로 잡고’ 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이 헛된 복음들로 인하여 너무 혼탁해졌다.
이제라도 우리가 분별력을 가지고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신앙을 다시 세워야 한다.
순수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였던 청교도들의 교훈과 삶을 본받아야 한다.
그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야 한다.
거기에 우리의 구원과 축복과 영광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할 때 우리는 구원에 이르도록 자랄 수 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다면 우리는 더욱 그리해야 한다.
신령하고 순전한 젖을 사모하고 공부하고 헌신하여, 산 돌이 되어 신령한 집을 세우고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거룩한 제사장으로 사는 것이다.
(벧전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구약시대에는 아론 계열의 자손들만 제사장이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언약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상속자가 되고 그분과 함께 하는 제사장이 되었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다.
(9)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왕 같은 제사장, 그것이 하나님의 상속자인 우리가 살아야 할 신분이다.
환경 때문에 원수 때문에 비실비실하지 말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오늘 나의 신분을 확실히 알고 어깨를 펴시기 바란다.
왕 같은 거룩한 제사장이 살아야 할 일을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어둠에서 불러내어 빛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려야 한다.
주일날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은 본인의 신분을 망각하고 신령한 제사를 저버린 것이다.
수요일과 금요일에 세상과 가정 일로 바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는 일을 소홀히 하고서
어찌 나와 내 가정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형통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로마서는 말씀한다.
(롬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와 삶을 통해서 우리는 영적 예배를 하나님께 드린다.
이 영적 예배를 통해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할 일은 그분의 덕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분의 놀라운 빛에 들어가게 하셨음을 인정하는가?
골로새서는 흑암의 권세에서 우리를 아들의 나라로 옮겼다고 말씀한다.
골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어둠의 권세에서 빛의 세계로,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것을 확실히 알고 체험한 사람은
그분을 높이 찬양하고 그분의 덕을 우리는 만방에 선포해야 한다.
그것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 택함을 받은 산 돌, 신령한 집, 거룩한 제사장이 즐겨 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한다.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을지라도 하나님께는 산 돌로 택함 받아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
우리는 택함 받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제사를 드리고
우리를 어둠에서 빛의 나라로 구원하신 그분의 덕을 선포해야 한다.
이와 같은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하시고 영광 가운데 높이시고 전적으로 사용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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