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퍼의 사회 개혁운동의 시대적 이해
- 근대세계의 사상의 흐름
20세기의 새로운 물결은 건물을 삼켜버리는 하리케인과도 같이 다가왔다. 이 시기의 인류 역사는 참으로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서있게 된 것이다. 특별히 프란시스 쉐퍼가 유럽여행 중에 찢어지는 심정을 가지고 그 평안한 미국의 사역을 버려 두고 유럽으로 오게 된 원인은 바로 이와 같은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살고있는 유럽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이었다.
유럽의 사항은 그 시대의 연표만 보더라도 정치 경제적인 변화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20세기는 다양한 환경을 경험하면서 엄청난 구조적 변화를 격게 된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의 중심부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첫째는 자본주의적 경제관계에 입각한 국제관계이고 둘째는 이로 인한 전쟁이었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는 정치-경제의 구조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의 상황은 국제적인 화해의 무드 위에 각국의 경제적 안정과 성장을 위한 진통이 있었다. 특별히 사회주의 사상의 발흥과 함께 각종 노동운동이 일어났으나 자본주의가 승리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유럽은 지속적인 번영을 꿈꾸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꿈은 "불길한 목요일" 1929년10월24일의 뉴욕시장에 1,600만주가 넘는 매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주가의 하락을 가져왔고 이것은 전 유럽의 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마침내는 번영의 꿈이 깨어지는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단기간에 끝나리라 생각되었던 대공황은 장기적으로 이어졌고 이에 각 국가는 대공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국가는 대외적으로 적극적인 대책을 모색했는데 그것은 바로 보호무역주의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세계 경제의 위축가운데 이미 확보한 시장을 배타적으로 장악하고 블록경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도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만 이것은 국제적 긴장을 초래하는 요소가 되었다.
실제로 이 요소는 파시스트의 국가의 팽창주의와 충동하면서 군사적 긴장상태를 가져왔다. 특히 독일은 1933년 히틀러의 집권아래 독일 민족의 생활권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군사력 증강를 가져왔고 이러한 기반으로 독일의 팽창정책은 이탈리아와 일본과 함께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1939년부터 시작된 이 전쟁은 1944년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 전쟁은 유럽을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전쟁의 아픔을 겪고 난 유럽은 1차 대전 때와는 다른 양상인 거대한 소련의 등장과 자본주의 상징인 미국이 대표되는 냉전시대가 도래하였지만 각 나라는 새로운 번영을 뭉치게 되었다. 특히 1950 -70년까지 서구의 상황은 한국전쟁의 여파로 호황을 누리게 되었고 발빠른 회복을 가져오게 되었다.
프란시스 쉐퍼의 여정은 바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에서의 사역이었다. 폐허의 무덤 위로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부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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