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쉐퍼의 환경윤리에 대하여
“결혼의 성에 있어서나, 사업에 있어서나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라는 기반위에 합당하게 사람과 사물을 하는 것이 그 자체로 올바른 일이고 또한 좋은 결과를 낳는다. 그럴 때, 인간성이 꽃피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연이 단지 의미가 없는 개체이고, 의미를 던져줄 만한 보편자가 없다면, 자연의 경이로움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보편자가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말씀하심으로 그의 창조계를 대하는 범주를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드신 것과 하나님이 만드신 나 자신은 모두 경이로움과 위엄과 실질적인 가치를 갖고 있는 존재이다. 사물은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하나님이 부여하신다. 그런즉, 내가 의식적으로 어떤 사물에 부가한 가치는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가치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여서, 하나님이 부여한 사물의 경이로움을 우리의 잘못으로 제거하지 말 것이다. 왜냐하면, 나 역시 유한하기 때문이다.---인간은 자율적이고 왜곡되어진 세계에 살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어떤 보편자도 어떤 경이로움도 찾을 수 없고, 자연은 인간이 이기적이고 거만한 방법으로 이용하거나 혹은 착취할 수 있는 것(thing)으로 전락해버렸다”.
(「환경오염과 인간의 죽음」(pollution and the death of man) ,생명의 말씀사 번역본, 77-78쪽).
*자연의 가치와 기독교적 환경윤리에 대하여:
위의 인용구에서 보듯이 자연의 가치는 인간이 자연에 의식적으로 부여하는 어떤 가치에 의하여 그것이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연에 부가한 가치 때문에 가치를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노력으로 자연을 구하려고 하는 지나친 근본주의적 생택학(deep ecological)적 관심은 너무 자연에 대하여 낭만적인 가치를 두려고 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또한 자연과 우주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는 존재이지, 그 자체가 어떤 신적인 본질을 갖는 것이 아니나, 많은 범신론자들은 자연을 신성시하면서, 자연을 통하여 인간의 구원이 오는 것으로 말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그런 영역에 있는 자연물까지도 어려움이 생기는 것을 보면, 자연의 그런 신음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것으로 구속의 날까지는 부분적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연이 악한 것으로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은 자연물과도 언약(창9장)을 맺으시고,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은 자연의 영역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어서, 언제가 주님의 부활시에 모든 만물도 다 구속되는 것을 생각할 때, 자연에 대하여 우리들은 소중하게 여기는 윤리적인 태도를 계발하여야 한다.
*환경문제에 있어 기독교에 대한 비판:
일반적으로 불신적 사회에서 기독교는 환경문제를 일으킨 주범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있음을 쉐퍼는 인정하고 이 책에서 기독교에 관하여 비판적인 두 지성인의 글을 통하여서 환경 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답변을 주고자 한다. 즉, 린 화이트(Lynn White) 2세라는 사람이 쓴 “생태계 위기의 역사적 뿌리들”이라는 논문을 보면, “우리 시대는 기독교이후 시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태학의 분야에서는 아직도 기독교적인 사고방식(mentality)이 유지된다”고 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말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지배권이 있다고 가르쳤고, 따라서 사람들은 자연을 파괴적인 방식으로 다루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기독교가 “자연에 대하여 좋지 못한 견해”를 제공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환경오염과 인간의 오염」 15쪽).
화이트의 말에 의하면, “인간이 생태계를 대하는 방식은 인간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과 관련하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가에 달려 있다. 인간의 생태계는 자연과 운명에 대한 인간의 믿음인 종교에 의하여 크게 좌우 된다”는 것이다. 그의 이 말은 인간은 생각한 바를 행동에 옮긴다는 것으로 상당히 일리가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 어떻든 그것을 인간은 외부세계에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의 뿌리는 종교적인 것이므로, 그 치료책 역시 종교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하면서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것이 앗시시의 프란시스에게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프란시스는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군주적인 지배를 종식시키고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의 민주주의적인 체제를 세우려고 하였다는 것이다(위의 책,100).
후대의 주석가에 의하면, 프란시스는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꾸짖으려는 뜻으로, 차라리 새들에게 설교를 하였다고 하는데, 그는 작은 새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가르쳤고, 새들은 영적인 환희가운데에서 그들의 날개를 펄럭이며 짹짹 소리내어 찬양하였다고 하면서 대안으로 그의 사상을 제시한다. 그는, 프란시스는 중세세계에서 기원한 역동적인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결과에 아주 독창적으로 저항하여, 인간이 피조물을 무제한 적으로 지배한다는 사상을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이 동등하다는 사상으로 대체하려고 시도하였다고 역설한다.
이와 같은 화이트의 논의가 주목을 끌게 되자 리차드 민즈라는 어느 사회학 교수는 이런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범신론적으로 접근할 것을 권유한다. 사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이 범신론이 생태학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하는데, 쉐퍼는 바로 이 점에 대하여 비판을 하고 있다.
쉐퍼는, “그동안 기독교가 일찍이 유물론적인 과학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여야 했지만, 그리스도인 자신들도 그런 테크놀로지적인 성향에 지배되지 않음을 잘 보여주지 못하였기”에 많은 이들이 범신론으로 돌아섰음을 안타깝게 여긴다. 즉, 그리스도인이 그동안 과학의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모두 다 해서는 안 된다는 어떤 기본적인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일반 사람들에게 잘 보여주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는 지구를 구할 기회를 우리 기독교는 놓쳤을 뿐만 아니라, 이 세대에서 우리들은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에 대한 실제적인 감각을 가진 현대인들이 많이 범신론적인 사고방식에 빠지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현대인들은 사실상 그리스도인들이 자연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이미 보았기 때문에 급속도로 범신론으로 기울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는 과학기술만능주의를 버리고 환경윤리에 대하여 진지하게 실천하는 사람으로 세계에 알려져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범신론은 환경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자연의 균형의 파괴라는 이 문제는 단순한 미학적인 문제나 앞날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이미 현대인의 생활의 질이 떨어지고 있기에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핵전쟁의 위협보다, 생태계의 위협이 이제는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인이 기독교를 적대시하면서 주장하면서 환경윤리의 대안으로 주장하고 있는 동양적인 범신론의 사상에는 “하나님의 창조”와 같은 개념, 즉 ‘하나님은 인격적인 신으로서 창조를 하고, 그가 창조한 것은 그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의미를 가진 그러한 개념은 결코 들어설 여지가 없다. 범신론은 사람이나 어떤 개별자, 그리고 자연에 대하여서도 역시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으로, 인간이 범신론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결과는 인간의 감정의 투사를 통하여 보다 낮은 차원의 피조물에게 인간의 반응을 부여하는 일종의 낭만주의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범신론을 비판해야만 하는 것은 이 범신론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범신론을 실제적이고 종교적인 대답으로서가 아니라 사회학적이고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방식으로 도덕이라는 말을 조작하고 이용(27)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범신론적인 해답은 이론에서만 허약한 것이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범신론은 인간의 지위를 높이기보다는 항상 인간을 비인격적이고 낮은 자리로 이끌어 간다. 모든 것을 에너지 소립자로 환원시키는 현대과학주의든지 혹은 동양의 사상이든지, 범신론적인 견해는 궁극적으로 자연을 고상하게 하지 못함은 물론, 인간까지도 낮은 위치로 떨어뜨린다.
즉, 자연을 범신론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어떤 때에는 자연이 인간에게 자애로운 면과 더불어서 인간의 적이 될 수 있다는 측면을 동시에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범신론은 자연의 모든 것을 다 정상으로 보기에, 자연의 비정상적인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어떤 지역에 유행병이 돈다고 할 때, 그리스도인은 그것과 싸울 수 있으나, 범신론의 영역에서는 자연이 인간에게 자주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와 같은 범신론은 인간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즉, 인간의 존엄을 위한 기반에 있어서 그 빈약함을 드러낸다. “나는 살고자 하는 생명 속에 있는 살고자 하는 생명” 범신론을 대변하는 슈바이처의 이 말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즉 동물의 생명에의 요구는 본능적임에 대하여 인간의 생명에의 요구는 본능적이지 않고 윤리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물의 생명의 본능은 생명파괴의 본능(예/박테리아, 쥐, 이, 에이즈 균)이라는 또 다른 측면이 있기에, 우리들은 이에 대하여 저항을 해야 하는 것이이라고 범신론적인 사상을 말한 슈바이처도 말년에는 동료들 보기에도 별로 고상하지 않았으며, 그 자신도 말년에는 생명에 대한 외경보다는 생명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더욱 많이 가지기를 소원하였다고 말한다.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에도, 인도의 경우는 범신론 때문에, 쥐와 소가 필요한 사람이 먹을 모든 곡식을 먹어치워서 결국 인간이 굶주리어 높아지지 않고 낮아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은 범신론 때문에 인간은 인격과 사랑이라는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의 영역에서도 역시 이렇게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원론적인 기독교도 환경문제의 해답은 아니다:
과거의 비잔틴 시대의 기독교는 자연을 하나의 상징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삶의 유일한 실제를 천상적인 것으로만 국한하여서 자연의 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주지 못하였다. 또한 플라톤적인 개념이 섞여있는 이원론적인 기독교의 견해는 지성의 올바른 사용에 대한 관심이나, 적절한 육체의 즐거움에 대한 강조가 없었다. 그들에게 자연은 단지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변증적이고 학문적인 증거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어떤 극단적인 부류의 칼빈주의자들은 동물들은 영혼이 없어서 천국에 못 간다고 하여서, 동물들을 실제로 발로 걷어차고 때렸다고 한다. 이와 같이 기독교 내에서도 오직 천상적이고 상층부에 속한 것과 오직 천국에 가는 것에 관심을 두는 자들이 있었다. 종교개혁이후에 와서야 비로소, 네덜란드의 화가들(반 아이크, 마사치오, 뒤러)은 자연을 적절한 위치에 두고 실제의 자연에 관심을 가지고서 자연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결론/ 기독교적 창조적 관점:
기독교의 관점은 만물을 하나님이 동등하게 창조하셨다는 점으로서, 창조에 관한 한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기원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동물과 식물과 기계는, 오직 하나님이 그들 모두를 창조하였다는 관점에서 볼 때 독같이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인격성의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관계는 상향적이다. 그리고 인간은 인격을 지녔다는 면에서 창조물가운데서 독특한 존재이나, 인간이 유한한 피조물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모든 피조물과의 적절한 하향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기 때문에, 범신론자들처럼 균형을 잃어 하향적인 관계만을 갖는 것을 거부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기계에 위협을 당하는 것처럼 그러한 위협을 당하지 않는다. 즉, 인간을 단지 수소원자, 광범위한 에너지 소립자로서 보지만 않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로 보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주위를 돌아보면서, 동물과 식물과 원자가 창조된 것과 우리 자신도 창조된 것에 대하여 어떤 동일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열등한 창조의 형태인 자연과 분리되어 있으나, 동시에 그 자연과 결합되어 있음을 안다. 이 두 가지를 전부 인정하여야 된다는 것은 범신론과 같은 다른 어떤 철학도 가지고 있지 못한 개념이다. 인간도 동물과 같은 호흡기관이 있고, 심리학적인 조건화가 있고, 기계적인 작용도 인간에게 있으나, 그렇다고 인간이 기계에 압도당하거나 위협받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그러하다. 또 우리 그리스도인은 기계적인 작용과 어느 정도의 심리적인 조건화를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자연들과 우리가 하향적인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범신론자과는 다르게 자연이 보이기 시작하며, 우리가 자연과 구별되나 그것과 관계를 맺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지적으로, 또 심리학적인 어떤 느낌으로 즉, 자연을 알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를 느껴야 하는 것이다. 즉, 자연을 변증적으로가 아니라, 창조의 측면에서 자연과 우리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여, 자연을 심미적으로 그리고 통합적(자율적이 아니라는 의미에서)으로 다루어야 한다. 즉, 하나님이 그것을 각기 그 고유한 영역에서 특별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것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다.
베이컨은 “인간은 타락에 의하여 그의 무죄한 상태와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였으나, 이런 것을 현세에서 다소 회복할 수 있다. 전자는 종교와 신앙으로 후자는 예술, 과학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의 말대로, 인간은 자기의 아래에 있는 사물들을 현실에서 의식적으로 여기에서 “의식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인간은 이미 과거에 창조권에 대한 지배권을 받았으나, 타락한 이후에 이것을 인간은 잘못 사용하여 인간은 그것들에 대하여 자율권이 있는 듯이 착취하고 있는데, 그것을 의식하여서 지금이라도 자연을 돌보아주라는 의미이다.
자연을 지배하고, 다루도록 요청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산업혁명시기를 돌아볼 때, 그 당시의 경제적인 착취와 자연남용에 대하여는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교회적인 차원에서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실질적인 치료를 제공하여야 한다. 만약, 이렇게 인간이 올바른 태도로 자연과의 관계에서 실질적인 치료의 접촉을 시작하면, 자연 속에서는 그 아름다움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경제적이고 인간적인 가치들도 덧붙여서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하여 성경의 세계관과 철학에 따라 사물들을 대함으로, 세상이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실패한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좋게 만들어 낼 수 있다.
*환경오염에 대한 성경적 기독교의 실질적인 치료책:
타락으로 말미암은 소외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의 분리, 인간 자신으로부터 인간의 분리,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분리, 자연으로부터 인간의 분리들(58)이 있기에, 이와 같은 분리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실제적인 치료와 구원을 베풀어야 한다. 기독교에 기반을 둔 과학과 테크놀로지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을 미래의 완전한 치료를 기다리는 한편, 현실에서 자연을 실질적으로 치료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만약에 그리스도인 개인이나 교회가 그런 의미에서 환경윤리를 실천하는 실험공장(69)이 되어서, 인간과 그 자신과의 문제, 인간과 인간의 문제, 인간과 자연의 문제를 치료하는 일을 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세상이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제, 환경오염에 대하여 “그만!”이라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시점에서 무엇보다 인간의 탐욕이 자연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인간은 자연을 자연이하로 그리고 인간을 인간이하로 다루고 있는데, 그 이유는 현대인이 근대과학의 잘못된 기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연을 자연으로, 그리고 인간을 인간으로 다룰 그런 만한 범주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물론적인 과학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이제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인간과 자연에 대한 테크노롤지적인 성향에 실제로 지배당하지 않는 것을 과감하게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한계를 갖고 있고, 그래서 하고 싶은 대로 모든 일을 하지 않다는 것을 세상의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즉, 리처드 민즈와 같은 범신론자들처럼 실용적인 입장에서 생태계에 관심을 갖고 그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생태계를 사랑하여야함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필요로 하고 있는 그 자연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을 이용할 방법을 찾아서, 자연의 균형을 보다 온전하게 유지시켜야 하기 위하여서는 자연에 대한 지배권(창1:28)을 “자연을 돌보는 섬김의 행위”로 재해석하는 윤리적인 태도를 정립하여야만 한다. 즉, 의식적인 노력을 통하여 자연의 상처에 대하여 실질적인 극복이 이루어지도록 실질적인 치유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여야만 한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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