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남준목사

사랑은 끌 수 없어라

새벽지기1 2016. 4. 22. 23:04


성경 시대의 사람들은 도장을 항상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들에게는 시대에 따라 도장을 몸에 지니는 몇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도장을 품에 넣고 다니는 것입니다. 한 예로 유다가 며느리 다말과 행음할 때 그 징표로 지팡이와 끈과 도장을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창 38:18). 그리고 또 하나의 예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가 가락지를 끼워 주는데 그 가락지가 바로 대외적으로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는 도장이 새겨진 반지입니다. 그들은 도장을 가지고 권리를 행사했으므로 언제든지 도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서에는 오른손에 끼게 되어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렘 22:24).
신부는 사랑하는 신랑에게 간절히 부탁합니다. “너는 나를 인(印)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즉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도장을 소중히 여기고 항상 몸에 지니듯이 나와 함께 있어 나를 홀로 두지 말라.” 이 말을 교회에 적용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됩니다. “이 땅의 교회들이여, 너희는 나로 마치 너희 몸에 지닌 도장과 같이 너희와 함께 있게 하라.”


주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당신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인자를 행하고 공의를 실천하며 겸손히 그분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와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우리가 그 사랑을 본받아 반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즐거워하고 우리는 주님이 거기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한없이 행복한, 그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물리적으로 신자가 교회 가까이 있는 것을 의미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하나님 옆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의 영적 교제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간결하지만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1)


우리와 함께 있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단지 “주님 오시고 싶으면 제게로 오십시오”의 삶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듯이 우리도 주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속에서 사랑의 관계를 지속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곁에 있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만큼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그분을 가까이하기를 원해야 합니다.


거기에 깊어 가는 사랑이 있고 서로를 소유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하나님과 삶에 관한 모든 아름다운 지식들은, 우리 안에 이러한 사랑이 역사하고 있을 때 비로소 흙으로 빚어진 사람에 생기가 깃들여 사람 아담이 되게 한 것 같은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 감동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목이 메는 것은 솔로몬의 여인과 같은 아름다움도 고운 마음씨도 순결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직도 죄인이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를 위해 죽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이러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입증하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이룬 아들의 죽으심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최상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당신과 동일한 최상의 것으로 응답하는 사랑의 고백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잠시 머무는 세상에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 붙잡혀 때로는 통곡함으로, 때로는 담대함으로, 때로는 핏빛 분노로, 때로는 가슴 저미는 애절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잃어버린 우리가 그 사랑을 다시 찾기 위하여 헐떡거리고 그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병든 마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사랑 없이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시는 것은 주님에게 있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에 버금가는 고통입니다.


19세기의 마지막 청교도라고 불리는 찰스 스펄전은 고단하고 분투하는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생은 요즘 목회자의 수와는 비교가 안 되는 오십대 중반으로 마감되었지만, 끊임없는 복음 전파의 열정과 그의 목회적 성공을 시기하는 사람들과의 신학적인 논쟁과 저술에 숨가쁜 나날을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그 사람만큼 쉴 새 없는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도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유언을 보면 그가 일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병약한 부인을 뒤로 하고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이 하나님의 사람의 마지막 유언을 들어 보십시오. “여보, 나는 그토록 오랜 동안 그분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오.”


일을 붙들고 산 사람들은 일과 함께 인생이 끝나고 사람에 매여 산 사람은 사람들과 함께 변해 가지만, 주님과 사랑에 빠진 것이 인생의 동기가 된 사람들은 죽음의 휘장이 드리울 바로 그때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있기를 원하는 그의 사무치는 그리움이 실현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 1:23).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진실한 인격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은 사람이 가진 재능이나 유능함이 아닙니다. 남다른 지식이나 기발한 아이디어나, 차가운 제도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감동의 대상은 사람입니다. 당신이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피로 구해 주신 사람들이 자기를 향한 사랑을 알고 주님의 마음을 본받은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렇게 당신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알리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일들을,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유명한 다수에게 맡기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온 삶을 하나님 앞에 다 태워 드리고 싶어 하는 무명한 소수에게 맡기시며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누구도 다했다고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길 같던 사랑은 변하여 불길 같은 투기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심판과 징벌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 사랑의 역사라 불러도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진노의 엄중함을 뒤집어 보면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셨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을 향해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바로 그들에게 이런 사랑의 관계로 다시 들어오라는 간절한 부르짖음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하여 고통이 깊어질 때 우리는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당신을 본받아 당신을 사랑하기까지, 그칠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불꽃같은 사랑을 봅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은 징벌이 아니라 당신과 다시 사랑을 나누는 관계가 되자고 부르시는 그분의 애달픈 호소이기 때문입니다. 한없는 주님의 사랑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그분께 드리는 대신 세상과 세상 사랑에 모두 바치고,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을 하나님의 품에 거하는 것보다 좋아한다면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질투와 대면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질투는 상처를 주지만,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 사랑의 관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소원을 불러일으켜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며 살았던 나날들을 뉘우치게 만들어 줍니다.
때로는 주님의 이러한 질투와 투기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원망하게도 합니다. 돌아오도록 때리시는 주님의 깨우침에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때리시고 싸매시며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성경은 말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앞에서 살리라”(호 6:1-2).


우리가 주님 앞에 돌아오게 되면 우리가 잘못된 삶을 통해 그분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시게 했는지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억압과 강제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기뻐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뉘우치게 하시고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하기를 원하는 갈망을 갖게 하십니다. 우리의 뉘우침과 돌이킴은 하나님의 투기를 다시 사랑 관계로 바꾸어 놓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연단이나 시련을 주시거나, 또는 우리가 그분께 징계를 받는다고 생각할 때 그 상황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미움과 질투는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네가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


주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사랑을 회복시키실 때 우리는 다시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우리 중 주님과의 사랑이 깨어졌던 경험을 한 번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이렇게 그분을 사랑하며 남들이 부러워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은 우리를 고치신 하나님의 질투하시는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향해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