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정대운 목사의 <길잃은 한국교회>(1)
90년대 후반 서점의 한쪽 구석에서 1984년 3판 발행된 로이드 존스의 산상설교집 下권을 집어 들었다. 책은 누렇게 되어 있었으며 먼지는 푹 쌓여 있었다. 사랑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온다고 하더니, 이 낡은 책은 예상치도 못하게 마틴 로이드 존스와의 뜨거운 사랑에 빠지게 하였다. 그때부터 몇 년에 걸쳐 로이드 존스의 책의 대부분을 모았으며 밤낮으로 읽었다. 로이드 존스로부터 시작된 영적 탐험은 시간을 거슬러 계속되었다.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 등을 만나며 아마존과 같은 드넓은 강가에서 한동안 절망과 소망, 두려움과 기쁨을 오가며 머물렀다. 그들을 따라 오르자 이제 더 좁아진 칼빈을 만났고, 그 깊이에 무릎을 꿇었다. 도무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그의 통찰력과 성경 앞에서의 진지함은 성경을 대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고 결국 바울에게로 다다르게 해주었다. 거슬러 올라가니 성경이 버티고 있었다. 성경에서 생수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특히 바울 서신을 공부하며 ‘바울은 천재가 아니라 신적이다’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바울 서신이야말로 성령께서 쓰지 않았으면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것들로 넘쳐났다. 이렇게 우연히 시작된 영적 탐험은 필자를 성경으로 이끌었다. 과거에 가졌던 성경에 대한 이미지는 전혀 새로운 것으로 다가왔다. 성경은 변화가 없었지만 내 눈이 바뀐 것이다. 성경으로 빠져들었다.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왕하 22:13) 그렇게 즐겁게 한참을 보냈다. 천상의 세계에서 둥둥 떠다니던 어느 날 몇 가지 작은 문제들을 발견하였고, 이것은 예상치도 않게 심각한 문제로 나를 이끌었다. 분명히 선명하게 말씀을 강해하는 기독교 고전의 저자들의 글과 한국교회의 유명한 목사나 저자들의 글이 몇몇 부분에서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조국교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몇몇 설교자들과 저자들의 설교를 듣게 됐고 책을 읽게 되었다. 그 결과 혼자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심각한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한국 대형 교회들중 많은 경우 우상숭배의 길로 들어섰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과 영, 미 개혁주의 목사들(청교도)이 길게는 500년, 짧게는 몇 십년 전에 외치던 소리가 현재 한국교회를 들여다보며 외치는 듯하였고, 더 나아가 내 자신을 향해 가슴이 시리도록 외치는 것 같았다. 개혁자들이 금하는 것들만 골라서 한국교회가 하고 있는 것을 인식하며 깜짝 놀랐다. 로이드 존스의 목소리, 스필전의 목소리,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외치는 소리로 들렸으며, 칼빈의 목소리도 그랬으며 더 나아가 바울의 성경도 내 마음에 큰 두려움을 심어주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성경이 지금 내게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지를 수 있는가? 성경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할 말을 잃고 앉아 있을 때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날선 검처럼 내 심장과 폐부를 찌르고 있었다. 더 나아가 한국교회에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었다. 두렵고 떨렀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의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이는 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양하며 그 손의 모든 소위로 나의 노를 적발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나의 이곳을 향하여 발한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왕하 22:16, 17) 여호와의 진노는 다가오고 있었으며 탈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기독교 대한민국호가 느리지만 분명하게 침몰하고 있었다. 한국의 기독교호는 매우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마지막을 고하는 듯 소리를 낸다. 이곳저곳에서 음울한 쇳소리가 커지자 배안의 승객과 승무원들은 혼비백산하고 있다. 승무원들은 기분 나쁜 소리의 근원을 찾아 동분서주하였지만 결코 대한민국 기독교호가 침몰하는 근본 원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교회는 이상 징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한국교회의 문제에 대한 인식을 가진 몇몇 지식인, 목회자, 신학자들에 의해 이런저런 책들이 쓰여 지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그러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곡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기로 했다. 끊임없이 대형교회들의 문제는 사회에 보고되었고, 한국교회는 일부일 뿐이라고 애써 변호해 왔다. 일부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지만 결코 일부일 수 없다. 오히려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부끄러움을 다행으로 여길 정도이다. 대형교회는 하나씩 사회의 웃음거리가 되어가고 있으며 그동안 한국교회를 대표해 온 교회들의 이런저런 부끄러운 일들이 드러나고 있다. 대형교회이기에 공격당하는 것이 아니다. 대형교회이기에 드러날 뿐이지 사실 중소형교회라고 별반 차이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대하여 빈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듣고 마음이 인하여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왕하 22:19)
핍박에 있어서 초대교회와 현대교회의 차이점 기독교에 대한 세상적 핍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은 당연한 것이라 이야기한다. 처음부터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싫어하기에 어쩌면 당연히 세상이 교회를 싫어하고 핍박한다고 한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사도들과 교회들이 핍박당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지만, 지금의 현대교회가 당하는 핍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초대교회를 핍박하던 자들은 교회를 싫어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교회를 두려워하였다. 흑암의 권세가 진리를 선명히 밝히는 교회들을 보면서 몸부림치는 것이었다. 즉, 흑암의 권세는 예수를 처치하고 싶었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다 하시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막 11:17-18)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를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막 14:1-2) 그 당시 예수는 세상 사람들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회개를 촉구하던 세례 요한은 헤롯의 죄를 지적하였다. 헤롯이 그의 동생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가진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 목소리 높여 지적하였다. 헤롯은 그를 죽이려 하였지만 쉽지는 않았다.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마 14:5) 민중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알므로 죽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헤롯 자신도 세례 요한에게 꼼짝하지 못했다.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막 6:18-20) 이 시기는 세례 요한이 감옥 생활을 할 때이다. 그럼에도 요한이 헤롯 앞에서 말했다는 것을 보면 헤롯은 자주 세례 요한의 갇힌 감옥으로 면회를 간 것 같다. 그럴 때마다 세례 요한은 서슬퍼런 눈으로 헤롯을 쏘아보며 “당장 그 불법적인 결혼 생활을 청산하시오. 하나님이 두렵지 않소!”라고 호통을 쳤다. 누가 왕이고 누가 죄수란 말인가? 헤롯은 그런 세례 요한 앞에서 쩔쩔 매지 않을 수 없었다. 헤롯의 깊은 마음속에서는 세례 요한을 존경하는 것을 넘어 그를 두려워하고, 그가 분명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던 중 헤롯의 생일에 많은 대신들이 참석한 연회가 열렸다.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서 그곳의 대신들과 헤롯의 기분을 좋게 해주었다. 그러다 헤롯은 결정적인 실수를 해버린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헤로디아의 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어주겠노라 말하면서 맹세까지 해버린다.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여아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막 6:22-23) 그러자 그 여아가 헤로디아와 상의하여 결국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게 된다. 이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맹세한 왕은 심히 고민하였으나 어쩔 수 없는 상회 된 것이다.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막 6:26) 결국 헤롯은 세례 요한을 죽이게 된다. 헤로디아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신약의 악한 왕의 대명사인 헤롯조차 세례 요한을 의인으로 알고, 죽이기를 두려워하였으며, 그를 존경하였다. 양심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헤롯에게 이런 두려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세례 요한이었고 헤롯은 그런 의인을 죽이고 한시도 마음 편하지 않았다. 의인을 죽였으니, 하나님의 사람을 죽였으니 이제 하늘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을 해한 사람들은 결코 그 마음 깊숙한 곳에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사렛 예수가 등장한다. “그 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마 14:1) 헤롯은 예수의 소문 중 다음과 같은 소문을 듣게 된다.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마 4:12)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그렇다면 세례 요한의 전파 내용은 무엇인가?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마 3:1-2)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치는 예수라는 청년이 사람들을 많이 끌고 다닌다고 보고를 받은 것이다. 헤롯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항상 사라지지 않았던 두려움이 폭발한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만거야...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 의인을 죽이고 두려움에 떨던 헤롯에게 예수의 등장은 세례 요한의 환생과 같은 일이었다. 하나님의 사람, 의인을 죽였으니 아무 일 없이 지나가지 않을 것이라 헤롯은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하고”(막 6:14) 헤롯은 거의 미칠 지경이 된 것이다. 정신을 잃어버릴 상황이다. 이에 신하들이 그를 안정시켰다. “어떤 이는 이가 엘리야라 하고 어떤 이는 이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막 6:15) 신하들이 예수에 대해 말하길 “하나님의 사람인 것은 분명한데, 훌륭한 선지자 중의 한 명이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걱정하실 일이 아닌 듯합니다” ... 이에 헤롯은 대답한다. “헤롯은 듣고 가로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막 6:16) 헤롯은 끝까지 요한의 환생을 주장한다. 헤롯의 경우처럼 관원들, 제사장들, 사두개인들은 초대교회의 사도들을 두려워했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행 2:5-7) 베드로의 설교가 끝난 이후에 이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사도들에게 달려 나왔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사람마다 두려워 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행 2:43)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가두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큰 위험이 될 것 같아 그럴 수 없었다.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행 4:12)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 하니라”(행 5:11) 어둠이 빛을 싫어하듯이, 세상은 초대교회를 싫어하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교회를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현재는 어떠한가? 교회는 한국 사회의 놀림거리이자 비난과 비방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교회를 이기적인 집단이며 웃기는 집단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는가? 각종 뉴스에는 주기적으로 기독교 비리에 대한 보도가 나가고 그 보도가 나간 이후 먹이를 기다리는 하이에나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 기사를 즐기며 보고 있지 않는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교회는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인 것으로 그려진다. 무조건 자기와 반대는 마귀라고 소리치는 집단들, 상종하기 싫은 집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미국이 천국이나 되는 양 성조기를 흔들며 미국을 찬양하는 시청 앞에 모인 교인들, 기독교 비리를 방송하는 방송국 앞에서 찬송을 부르며 통성기도 하는 사람들, 다른 나라의 재난을 보며 ‘천벌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하는 목사들, 몇몇 부흥 목사들에게 속아서 ‘아멘’을 크게 하면 복 받을 것이라 생각하여 설교 시간에 한 문장만 끝나면 아무 생각 없이 ‘아멘’ ‘아멘’ 외치는 앵무새들, 오만 가지 죄는 다 짓고 회개만 하면 눈 같이 희게 된다는 피상적인 교리들, 회개라는 좋은 도구가 있어 피해를 당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 상처로 살아가는데 가해자는 이미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교인들을 ‘의인’이라고 보기보다는 ‘분노유발자’ 정도로 보지 않을까. 이처럼 한국교회 모습에서 세례 요한과 사도들, 그리고 예수님이 전파했던 것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형편없는 무언가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를 성경과 다른 무언가로 만든 목사와 단체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들의 책과 설교에서 그들이 지금 한국 강단에서 무엇을 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상대적인 비판보다는 성경과 교회사를 들여다보며 기준을 잡으려 한다. 다른 점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성경과 객관적인 교회사를 기준으로 말할 것이다. 그들의 대표적인 책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제 그들이 기독교를 무너뜨려온 과정을 보겠다. 정대운 목사의 <길잃은 한국교회> 연재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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