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로이드 존스

[스크랩] 최고 복음주의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Ⅰ

새벽지기1 2016. 1. 23. 07:19

최고 복음주의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Ⅰ
영혼을 움직인 설교자 8

 

권영삼 032kwon@naver.com

 

‘20세기 최고의 복음주의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David Martin Lloyd-Jones, 1899.12.20-1981.3.1)는 “교회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쇠퇴기에 빠진 시대는 언제나 말씀 전하는 것이 감퇴되어 있었다”라고 지적하고, “부흥의 여명을 알리는 것은 말씀전하는 것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목사와 설교> p.30에서).

작금의 한국교회는 성장을 멈춘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설교의 우위성이 흔들리면서, 설교 이외의 것에 무게를 두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교회마다 각종 편의시설과 프로그램과 친선 활동에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는 말씀 외에도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여러 가지 중요한 일들이 있다는 인식을 갖도록 만들고 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선포될 때 교회는 바로 선 시대였다. 반면에 교회가 타락한 시대는 설교가 타락한 시대였다. 이에 대해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 1908-1986)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기독교 진리는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너무나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기독교 진리는 우리의 마음에 전혀 닿고 있지 않으며, 마음을 변화시킬 힘도 없는 것이 아닌가?”(<현대교회의 고민과 설교> p.12).

여기서 더 나아가, 설교자는 ‘설교하는 바를 자기의 삶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진지하게 답해야 한다. 이 물음은 비단 설교뿐 아니라 설교자 자신까지도 불신하는 시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매우 어두운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설교의 홍수 시대’를 맞고 있지만, 그 누구도 우리 시대가 과거보다 영적으로 건강하고, 이전보다 더 생동감 있는 신앙적인 부흥기라고 말하지 않는다. 물이 범람하면 정작 마실 물이 더 없어지는 것처럼, 설교의 홍수 시대에 현대인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심각한 기갈 현상으로 탈진 상태에 있다.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회중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무기력한 강단의 문제다. 이것은 한국교회 강단을 책임지고 있는 설교자들을 향한 각성을 일깨워주는 외침이 아닐 수 없다. 마틴 로이드 존스가 제시하는 현대 강단의 문제에 대한 예리함과 그에 대한 권면을 통해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
마틴 로이드 존스는 1899년 12월 20일 부친 헨리 로이드 존스(Henry Lloyd-Jones)와 모친 막달렌(Magdalene) 사이에서 3남 가운데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19세기가 저물어가고 20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그는 성품이 온유했고 동료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반면, 진지하고 심각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유년시절 그가 다니던 학교의 포웰(S. M. Powell) 선생은 마틴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다. 역사를 전공한 그는 어린 마틴에게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고, 찬송시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갖게 했다. 특히, 포웰은 로이드 존스로 하여금 윌리암스(William Williams)의 찬송시에 깊은 신앙고백을 경험하도록 도와주었다.

16세세 때 그는 부모님의 격려로 의학공부를 결심했고, 성바돌로매 부속 의학교에 입학했다. 런던대학교 의과시험에는 탁월한 성적을 거둠으로써 웨일즈 신문에 이름이 실리기도 했다. 그 후 의학박사학위를 받고 왕립의과대학 병원에 봉직하면서 토마스 호더(Thomas Hoder)경의 조교로 일하게 되었다. 호더는 진단의 명수였다. 로이드 존스는 그에게서 요점을 생각하는 것, 원리를 설명하는 것, 정확하게 사고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 등 전문의적인 의료행위의 요점들을 배웠다.

그는 내과의사가 되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이해에 무언가 보탬이 되는 설교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휴톤(John A. Hutton)의 설교는 그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존 휴톤의 설교는 로이드 존스에게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깊은 감동을 주었는데, 그 능력은 곧 죄에 대한 인식이었다. 로이드 존스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잘못이 있다는 증거를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런던의 빈민가와 바돌로매 병원에서 환자를 만날 때마다 그들의 보이는 병을 본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원인인 죄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스승인 호더(T. Hoder)경의 카드에 적혀있는 논평이 의학적인 것도 아니고 지식적인 문제도 아닌 영적인 문제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6년, 27살의 나이에 설교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의학을 포기하기까지 그는 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가 선택한 의사 직을 포기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설교자로서의 삶은 하나님의 전적인 부르심이었다. 그는 이 부르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내가 설교자로서 어떠한 권위를 가지든지 간에 그것은 내 편에서 결정한 어느 무엇의 결과도 아닙니다. 나를 붙잡으시고 나를 이끌어내시어 이 사역을 위하여 구별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손이었습니다”(<영적 선택> p.156에서).

로이드 존스는 교단 신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헬라어를 공부했다. 하지만 당시의 신학이 지나치게 고등 비평적이고 자유주의적이어서 자신의 복음적인 신앙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교단 신학교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동료 내과의사 베단 필립스(Bethan Phillips)와 결혼하여, 그의 고향인 남웨일즈 아베라본에서 설교자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첫 목회시절(1927-1938)의 설교는 주로 전도설교(Evangelistic Sermon)였다. 죄 의식과 복음의 놀라움과 능력에 대한 확신을 설교했다. 첫 10년간의 목회 기간에는 한 설교를 일주일 내내 몸소 손으로 쓰는 것이 습관이었다.

아베라본에서 로이드 존스의 사역은 당시에 충격을 주었다. 장래가 촉망되는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전도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수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다. 그가 목회를 시작했던 1920년대 중반에 웨일즈 지역 목회자들 사이의 신학적 기류는 역사적 칼빈주의가 아닌 낙천적인 자유주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성경 말씀을 정확무오한 진리의 유일한 원천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설교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가 부임한 즉시, 그가 시무한 웨일즈의 한 장로교회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회심을 통해서 몇몇 악명 높은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교회에 다니기만 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 가운데는 그의 아내도 포함된다. 그의 사역 초기부터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었다.

그 후 1938년부터는 캠벨 몰간(G. Campbell Morgan, 1863-1945) 목사의 제의로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의 30년간의 목회가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얼마 안 되어 폭탄이 예배당에 투하되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약 500명의 성도들로서 새로운 교회를 시작했다. 1951년 웨스트민스터 채플은 약 2,500명이 출석하는 런던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다.

로이드 존스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캠벨 몰간의 역사적인 계승자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강해설교의 왕자’라는 그의 칭호를 계승했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는 그의 독특한 설교 방식을 발전시켰다. 성경 한 책에 대한 연속 강해설교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것은 베드로후서 강해설교다. 그는 이 설교를 시작해서 무려 21년 동안, 계속해서 연속 설교를 했다. 5년에 걸친 <에베소서 강해설교>, 12년에 걸친 <로마서 강해설교>,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에 관한 강해설교 등으로 이 모든 설교들은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들이다.

또한 그가 실제적이고도 영향력 있는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진리의 깃발사’와 ‘런던 복음주의 도서관’과 ‘런던 신학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또한 기독학생회(IVF: Inter Varsity Fellowship)와 기독의사협희(CMF: Christian Medical Fellowship)의 성장은 설득력 있는 능력의 증거요 로이드 존스가 행산 사역의 열매였다.

1968년, 로이드 존스는 심각한 병을 앓게 되자 목회 사역에서 은퇴했다. 그 후에도 12년 이상을 계속해서 설교했지만, 주된 사역은 책을 쓰는 일이었다. 그는 은퇴 후 자신의 13권으로 된 주요 설교집 시리즈와<목사와 설교>를 출판했다. 1981년 3월 1일, 그는 설교자로서의 삶을 다하고 그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

로이드 존스의 사상적 배경
마틴 로이드 존스는 정식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설교자다. 그러나 그에게 설교자로서 가장 두드러지게 영향을 미친 몇몇 사건들과 인물들이 있다. 그를 형성시켜간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그의 설교를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로이드 존스의 설교는 바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로이드 존스는 바울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사도 바울이야말로 뛰어난 천재이며 가장 학식 있는 바리새인, 가장 박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바울의 영성과 지성과 삶을 본받으려 애썼고, 그의 설교 가운데서도 바울의 가르침을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교육 방식도 바울 사도를 모방했으며, 바울 서신의 가장 위대한 강해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둘째, 청교도의 영향이다.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1971년 웨스트민스터 청교도 연구회에서 행한 ‘청교도주의와 그 기원’이라는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웨일즈 칼빈파 감리교회에서 자라났고, 그들의 역사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1925년 우연히 리처드 백스터의 최신판 전기를 읽은 후부터 청교도와 청교도 저작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의 사역 전체가 이것에 의해 좌우되어 왔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바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에 이러한 관심을 더욱더 부추긴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발견한 일이었습니다.

그 분의 책을 읽으면 누구든지 그와 동일한 자료들을 다시 읽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청교도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제가 볼 때에 어느 설교자라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청교도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것도 청교도주의처럼 참된 말씀 사역을 격려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그러한 면에서 뛰어난 모범이었기 때문입니다(<청교도 신앙 : 그 기원과 계승자들>, p.248-249).

로이드 존스는 특별히 벤자민 워필드(Benjamin Warfield),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로이드 존스는 워필드를 가리켜 지난 70년 동안 영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라고 평가했다. 로이드 존스는 워필드의 신학에 심취했다. 그것은 그의 신학이 성경에 기초했고 주해적으로 정확할 뿐 아니라 뜨거운 영성이 겸비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휫필드의 설교를 자신의 설교 모델로 생각했으며 언제나 그에게 용기를 얻었다.

“나는 용기를 잃거나 지쳐 있을 때마다 예외 없이 18세기로 돌아갑니다. 조지 휫필드가 나의 용기를 일깨우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18세기에 있었던 성령 운동과 그 커다란 부흥의 조류를 읽으십시오. 그 일은 설교에 있어서 말할 수 없이 귀중합니다”(<목사와 설교>, p.130). 로이드 존스는 설교를 하고 나서 교만해지려고 할 때마다 휫필드를 대하면서 겸손해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로이드 존스의 영적 스승이다. 만약 자신에게 권위가 주어진다면,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두 권의 전집을 모든 목사들의 필독서로 만들고 싶다고 공언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로이드 존스에게 끼친 영향은 거의 측량하기 어렵다. 로이드 존스의 목회는 에드워즈에 의해 통제되어 왔다고 고백할 정도다. 그는 에드워즈에게서 성령이 불타고 성령으로 충만한 지성과 부흥의 요소를 발견했다. 에드워즈는 로이드 존스에게 부흥의 강력한 필요성을 깨우쳐주었고, 그 부흥이란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결론을 얻게 했다.

그 밖에 로이드 존스는 존 번연(John Bunyan),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 존 오웬(John Owen) 등 17세기의 청교도들을 사랑했고, 18세기 설교자들을 존경했다. 그와 같은 청교도주의는 일생 동안 그의 신학적 사고와 설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셋째, 칼빈주의 메서디즘의 영향이다. 18세기 초 웨일즈의 상황은 영적인 면에서 매우 낮은 상태였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에서 죽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부도덕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때 위대한 각성과 부흥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부흥에 있어서 주요한 도구로 사용되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1714년 1월에 태어난 하웰 해리스(Howell Harris)이다. 그는 18세기 웨일즈의 칼빈주의 메서디스트였다.

웨일즈의 메서디즘은 전적으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신학을 개혁하려는 운동이 아니라 체험적인 실천적 신앙생활 방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웨일즈의 메서디즘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위대한 설교가 있었고, 위대한 주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뜨거운 열정과 부흥이라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그래서 웨일즈의 메서디즘은 ‘죽은 칼빈주의’가 아니라 ‘살아있는 칼빈주의’를 산출하는 성향이 있다고 말할 정도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웨일즈의 메서디즘은 차갑고, 서글프고 음울하고 침체된 칼빈주의가 아니었다. 감정, 열정, 뜨거움, 찬양, 감사로 나아가는 진정한 칼빈주의라고 고백한다.

로이드 존스는 13세에 하웰 해리스의 목회에 관한 소책자를 읽었는데, 이것이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특히, 그가 자라난 웨일즈 칼빈주의 감리교의 역사에 대한 이 첫 책은 역사에 관해서 평생 지속적인 관심을 일깨웠다. 위대한 부흥 시기의 교회사와 위대한 성도들과 설교자들의 전기에 대한 관심을 평생토록 갖게 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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