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나님은 전쟁을 허용하실까?
약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1. 하나님은 왜 전쟁을 허용하시는가?
부정적인 대답
하나님은 전쟁을 허용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은 그와같은 일을 하실수 없다거나 전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통제 밖에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전쟁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불평하는 2가지 전제를 보겠습니다.
1> 이 문제는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또 때때로 성경이 가르치고자 하는 바를 찾아내기를 위해 성경을 읽는 수고도 하지 않고 큰 소리로 떠들면서 제멋대로 가르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성경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신앙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그러나 최근들어 사람들이 점점 더 철학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상을 만들어낸 다음, 나중에 그 상이 잘못되었다것을 깨닫고 놀라고 화를 냅니다.
그러나 성경을 알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전쟁을 허용하시는 이유에 대한 문제 때문에 걱정하거나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가 신앙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그들은 성경이 천년왕국이 도래하기 전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약속한 적이 결코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종말이 오기 전에, 특히 마지막 완성의 때가 점점 다가오면, 난리와 난리 소문“이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악한 사람들이 점점 더 악해지고 이미 활동하고 있는 불법의 신비가 후에는 자유롭게 구속받지 않고 활동하게 되리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이 부분적으로는 그 자체의 내적인 타성 때문에, 또 복음의 전파와 하나님의 일반적인 계획과 바람 때문에 점진적으로 더 나아지리라는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위배됩니다. 그렇지만 이 생각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해왔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지식인들에게 교육을 받아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게 되면 더 이상 전쟁이 없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게 될 날이 임할 것이라는 말이 자주 들어왔습니다. 또한 학식이 높은 사람이 전쟁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며 무서운 일인지를 깨닫고 전쟁을 막으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보고 전쟁은 몹시 싫어하시는 하나님도 틀림없이 전쟁을 막으려 하실 것이라고들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전쟁이 없는 완전한 세상을 만들려 애를 쓴다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우리보다 더더욱 그렇게 하려고 애를 쓰실 것이라는 말이다. 즉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께서 전쟁을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실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이러식으로 밖에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이것은 순전히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생각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성경의 세계관은 철저히 비관론적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희망과 욕망과 소망을 하나님의 계획에 투사시켜 놓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놀라고 낙심하고 슬퍼하는 대신, 성경을 연구하여 이 세상에 대해 하나님이 무슨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무슨 약속을 하셨는지를 밝혀내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첫 번째 대답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전쟁을 막거나 금지하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어야 한다.
2> 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쟁을 금지하시리라고 기대하는가? 혹은 왜 하나님은 전쟁을 금지하셔야만 하는가? 전쟁은 죄이므로 하나님께서 전쟁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론적인 이유를 제외한다면 하나님께서 전쟁을 금하시기를 바라는 진짜이유는, 사람들이 평화로운 상태를 원하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살 권리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라 바로 뒤이어 또 다른 질문이 제기 됩니다. 이 질문은 이 주제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우리는 무슨 권리로 평화를 요구하는가?” “ 왜 우리는 평화를 바라는가?” 그동안 우리는 평화로운 상태에서 살 권리가 있음을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았습니까? 또 우리는 평화의 참된 가치와 목적, 그리고 역할이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물론 이 문제에 전혀 관심을 자져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없겠지요.
성경에는 우리가 평화를 바라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혀주는 구절이 적어도 두 개 이상 나온다. “ 사도행전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이 구절은 무시무시한 박해의 시기가 끝난 후 교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원하는 이유도 바로 이점에 있어야 합니다.
딤전 2:1-2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전쟁에 대한 공포와 전쟁의 고통 그리고 전쟁으로 말미암는 온갖 혼란과 곤경과 정상적인 생활이 방해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평화를 바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영위할 충분한 기회를 갖고 믿음에 최대한 시간을 투여하기 위해 평화를 갈구해야 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주된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목적을 이루도록 인간에게 생명이 부여된 것입니다. 또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땅에서 사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 곧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과 기쁨들은 이 일을 위해 이용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주된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화를 갈구해야 하는 이유는 전쟁 상태보다는 평화로운 상태에서 이 목적을 더 자유롭고 더 완벽하게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평화를 바란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과거에 사람들이 평화를 갈구한 이유도 이것이었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 평화가 임하도록 기도한 참된 동기가 이것이었습니까?
순전히 이기적인 동기로 인해서, 즉 전쟁의 결과들을 피하기 위해 평화의 기도를 드린 경우가 그동안 얼마나 많았습니까? 단지 자신들이 향유하고 있는 삶을 혼란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 평화를 간구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쾌락적인 생활만을 추구할 뿐,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게으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결과 종교가 타락했고 도적은 그보다 더 무섭게 타락했으며 마침내 정치와 사회 의식까지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욕되게 하는 생활을 계속 영위하기 위해 하나님께 평화로운 상태를 계속 유지시켜 달라고 요구해도 괜찮은 것입니까?
2. 이제는 하나님이 왜 전쟁을 허용하시는가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고찰해 보기로 합시다. 하나님은 전쟁을 허용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전쟁을 허용하실까요? 이것은 구체적인 진술들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어떤 기본 원리들을 이 특수한 문제에 적용시켜는 것에 관한 질문입니다.
1> 먼저 전쟁에 대한 성경의 입장을 다루어 보기로 합시다. 전쟁 그 자체는 죄가 아니라 죄의 결과입니다. 전쟁은 죄의 표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신정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식의 구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이 죄인지 아니면 죄의 결과인지를 주제로 삼아 논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은 전재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원인까지 파헤칩니다. 성경은 전쟁이 일어나게 된 여러 가지 정치, 사회, 경제, 심리적 요인들을 무시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러한 요인들은 직접적인 이유들, 곧 전쟁이 발발하게 된 실질적인 원인들에 불과합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바와 같이 전쟁의 궁극적인 원인은 쾌락과 욕망, 죄의 결과인 불안, 금지되고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강렬한 요구들입니다. 이것들은 개인적인 생활에서나 국가의 생활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이것들은 도둑질과 질투와 자랑과 미움, 그리고 부정과 이혼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들은 개인간의 분쟁과 싸움뿐만 아니라 국가간의 전쟁도 유발시킵니다.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마치 전쟁이 다른 것과 분리된 독특한 것처럼 전쟁을 따로 떼어놓고 다루지 않습니다. 전쟁은 죄의 표시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좀더 크게 보면 전쟁은 다른 모든 죄의 결과들과 본질적으로 똑같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목숨까지도 앗아간다는 이유를 들어 전쟁과 죄의 다른 결과들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생명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며 단지 욕망이나 복수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생명을 취하지 말 것과 하나님 편에서 보면 영이 몸의 생명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영원히 오래도록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자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우리는 시간과 수명 연장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 즉 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삶의 질임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이와같이 전쟁은 다른 모든 죄의 결과들과 똑같이 죄의 결과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금지시켜 달라거나 막아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죄의 특별한 결과들 가운데 하나를 금지 시켜달라는 것입니다. 또 만일 우리가 전쟁 그 자체가 죄라는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전쟁을 금지시켜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한가지 특수한 죄를 금지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한 가지 특수한 죄를 금지시켜 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요구는 이기적인 것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즉 특수한 형태의 죄 혹은 죄의 결과가 우리에게 특히 고통스럽기 때문에 하나님께 그것을 금지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나 우리의 죄에 관심이 있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죄를 금지시켜주시고 모든 불의한 일을 억제시켜달라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한하고 영원한 지혜를 지닌 하나님은 죄를 금하지 않고 죄의 결과들을 모두 억제하지 않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전쟁은 다른 것과 분리된 영적이고 종교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전쟁은 죄라는 중대한 근본 문제의 일부이자 표현입니다.
2> 성경은 전쟁이나 죄나 그 죄의 결과라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전쟁을 허용하시는 실질적인 이유들도 제시해 줍니다,
전쟁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사람들의 죄를 징벌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말로 표현된 기본 법칙입니다. 죄에 대한 징벌은 후대로 연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에 대한 징벌을 받습니다. 이런 일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얼마나 자주 나타났습니까? 이스라엘의 역사와 첫 번째 범죄에서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모든 고통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인 것입니다. 그러나 “왜 무고한 자가 고난을 당하는가?”라고 말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답변으로 첫째는 무고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둘째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죄 뿐만 아니라, 넓게는 인류의 죄, 좁게는 우리나라나 사회나 가족의 죄의 결과들도 떠맡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개인이면서 동시에 국가의 일원이자 인류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개인으로서의 우리를 구원하지만, 이 말은 우리가 더 이상 국가의 일원이나 인류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죄를 짓지 않은 무고한 사람도 타인의 죄에 대한 징벌을 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전쟁을 통해서 죄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로울 때 우리는 죄를 가볍게 여기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존재와 인간의 본성속에 들어 있는 악의 가능성들을 보게됩니다.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이기심과 미움과 질투와 시기 그리고 매정함과 악의입니다. 이것들은 개인적인 생활 관계나 사회적인 생활 관계에서도 나타나며 민족적인 혹은 세계적인 규모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평화로울 때 자비롭고 사랑스런 하나님에 대해 복음을 거부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자신이 하나님 없이도 완전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쟁을 통하여 그에게 보여줍니다. 죄의 본질과 그 결과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똑같은 것도 하나님께서 사랑의 손길로 베푸실 때에는 반기를 거부하다가도, 고통을 매개로 하여 떠넘길 때에는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최종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고 극심한 고통을 당해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되면 탕자가 아버지와 집을 생각했던 것처럼, 우리의 어리석음과 우둔함을 통탄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전쟁을 허용하신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내와 오래 참으심입니다. 하나님은 왜 전쟁을 허용하시는가? 라는 질문보다 하나님은 왜 이토록 죄악에 물든 세상을 전멸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는 것일까? 하나님은 왜 무한한 은혜를 베풀어 이 세상의 악과 죄에 한계를 정하여 그것들이 통과하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치시는 것일까? 하고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대신 죽어서 우리를 구원하도록 사랑하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도록 우리를 벌하고 우리를 가르치며, 무엇보다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전쟁과 같은 일들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약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1. 하나님은 왜 전쟁을 허용하시는가?
부정적인 대답
하나님은 전쟁을 허용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은 그와같은 일을 하실수 없다거나 전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통제 밖에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전쟁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불평하는 2가지 전제를 보겠습니다.
1> 이 문제는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또 때때로 성경이 가르치고자 하는 바를 찾아내기를 위해 성경을 읽는 수고도 하지 않고 큰 소리로 떠들면서 제멋대로 가르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성경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신앙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그러나 최근들어 사람들이 점점 더 철학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상을 만들어낸 다음, 나중에 그 상이 잘못되었다것을 깨닫고 놀라고 화를 냅니다.
그러나 성경을 알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전쟁을 허용하시는 이유에 대한 문제 때문에 걱정하거나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가 신앙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그들은 성경이 천년왕국이 도래하기 전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약속한 적이 결코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종말이 오기 전에, 특히 마지막 완성의 때가 점점 다가오면, 난리와 난리 소문“이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악한 사람들이 점점 더 악해지고 이미 활동하고 있는 불법의 신비가 후에는 자유롭게 구속받지 않고 활동하게 되리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이 부분적으로는 그 자체의 내적인 타성 때문에, 또 복음의 전파와 하나님의 일반적인 계획과 바람 때문에 점진적으로 더 나아지리라는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위배됩니다. 그렇지만 이 생각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해왔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지식인들에게 교육을 받아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게 되면 더 이상 전쟁이 없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게 될 날이 임할 것이라는 말이 자주 들어왔습니다. 또한 학식이 높은 사람이 전쟁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며 무서운 일인지를 깨닫고 전쟁을 막으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보고 전쟁은 몹시 싫어하시는 하나님도 틀림없이 전쟁을 막으려 하실 것이라고들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전쟁이 없는 완전한 세상을 만들려 애를 쓴다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우리보다 더더욱 그렇게 하려고 애를 쓰실 것이라는 말이다. 즉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께서 전쟁을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실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이러식으로 밖에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이것은 순전히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생각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성경의 세계관은 철저히 비관론적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희망과 욕망과 소망을 하나님의 계획에 투사시켜 놓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놀라고 낙심하고 슬퍼하는 대신, 성경을 연구하여 이 세상에 대해 하나님이 무슨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무슨 약속을 하셨는지를 밝혀내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첫 번째 대답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전쟁을 막거나 금지하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어야 한다.
2> 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쟁을 금지하시리라고 기대하는가? 혹은 왜 하나님은 전쟁을 금지하셔야만 하는가? 전쟁은 죄이므로 하나님께서 전쟁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론적인 이유를 제외한다면 하나님께서 전쟁을 금하시기를 바라는 진짜이유는, 사람들이 평화로운 상태를 원하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살 권리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라 바로 뒤이어 또 다른 질문이 제기 됩니다. 이 질문은 이 주제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우리는 무슨 권리로 평화를 요구하는가?” “ 왜 우리는 평화를 바라는가?” 그동안 우리는 평화로운 상태에서 살 권리가 있음을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았습니까? 또 우리는 평화의 참된 가치와 목적, 그리고 역할이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물론 이 문제에 전혀 관심을 자져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없겠지요.
성경에는 우리가 평화를 바라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혀주는 구절이 적어도 두 개 이상 나온다. “ 사도행전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이 구절은 무시무시한 박해의 시기가 끝난 후 교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원하는 이유도 바로 이점에 있어야 합니다.
딤전 2:1-2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전쟁에 대한 공포와 전쟁의 고통 그리고 전쟁으로 말미암는 온갖 혼란과 곤경과 정상적인 생활이 방해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평화를 바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영위할 충분한 기회를 갖고 믿음에 최대한 시간을 투여하기 위해 평화를 갈구해야 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주된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목적을 이루도록 인간에게 생명이 부여된 것입니다. 또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땅에서 사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 곧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과 기쁨들은 이 일을 위해 이용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주된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화를 갈구해야 하는 이유는 전쟁 상태보다는 평화로운 상태에서 이 목적을 더 자유롭고 더 완벽하게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평화를 바란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과거에 사람들이 평화를 갈구한 이유도 이것이었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 평화가 임하도록 기도한 참된 동기가 이것이었습니까?
순전히 이기적인 동기로 인해서, 즉 전쟁의 결과들을 피하기 위해 평화의 기도를 드린 경우가 그동안 얼마나 많았습니까? 단지 자신들이 향유하고 있는 삶을 혼란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 평화를 간구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쾌락적인 생활만을 추구할 뿐,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게으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결과 종교가 타락했고 도적은 그보다 더 무섭게 타락했으며 마침내 정치와 사회 의식까지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욕되게 하는 생활을 계속 영위하기 위해 하나님께 평화로운 상태를 계속 유지시켜 달라고 요구해도 괜찮은 것입니까?
2. 이제는 하나님이 왜 전쟁을 허용하시는가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고찰해 보기로 합시다. 하나님은 전쟁을 허용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전쟁을 허용하실까요? 이것은 구체적인 진술들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어떤 기본 원리들을 이 특수한 문제에 적용시켜는 것에 관한 질문입니다.
1> 먼저 전쟁에 대한 성경의 입장을 다루어 보기로 합시다. 전쟁 그 자체는 죄가 아니라 죄의 결과입니다. 전쟁은 죄의 표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신정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식의 구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이 죄인지 아니면 죄의 결과인지를 주제로 삼아 논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은 전재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원인까지 파헤칩니다. 성경은 전쟁이 일어나게 된 여러 가지 정치, 사회, 경제, 심리적 요인들을 무시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러한 요인들은 직접적인 이유들, 곧 전쟁이 발발하게 된 실질적인 원인들에 불과합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바와 같이 전쟁의 궁극적인 원인은 쾌락과 욕망, 죄의 결과인 불안, 금지되고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강렬한 요구들입니다. 이것들은 개인적인 생활에서나 국가의 생활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이것들은 도둑질과 질투와 자랑과 미움, 그리고 부정과 이혼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들은 개인간의 분쟁과 싸움뿐만 아니라 국가간의 전쟁도 유발시킵니다.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마치 전쟁이 다른 것과 분리된 독특한 것처럼 전쟁을 따로 떼어놓고 다루지 않습니다. 전쟁은 죄의 표시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좀더 크게 보면 전쟁은 다른 모든 죄의 결과들과 본질적으로 똑같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목숨까지도 앗아간다는 이유를 들어 전쟁과 죄의 다른 결과들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생명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며 단지 욕망이나 복수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생명을 취하지 말 것과 하나님 편에서 보면 영이 몸의 생명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영원히 오래도록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자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우리는 시간과 수명 연장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 즉 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삶의 질임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이와같이 전쟁은 다른 모든 죄의 결과들과 똑같이 죄의 결과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금지시켜 달라거나 막아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죄의 특별한 결과들 가운데 하나를 금지 시켜달라는 것입니다. 또 만일 우리가 전쟁 그 자체가 죄라는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전쟁을 금지시켜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한가지 특수한 죄를 금지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한 가지 특수한 죄를 금지시켜 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요구는 이기적인 것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즉 특수한 형태의 죄 혹은 죄의 결과가 우리에게 특히 고통스럽기 때문에 하나님께 그것을 금지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나 우리의 죄에 관심이 있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죄를 금지시켜주시고 모든 불의한 일을 억제시켜달라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한하고 영원한 지혜를 지닌 하나님은 죄를 금하지 않고 죄의 결과들을 모두 억제하지 않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전쟁은 다른 것과 분리된 영적이고 종교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전쟁은 죄라는 중대한 근본 문제의 일부이자 표현입니다.
2> 성경은 전쟁이나 죄나 그 죄의 결과라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전쟁을 허용하시는 실질적인 이유들도 제시해 줍니다,
전쟁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사람들의 죄를 징벌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말로 표현된 기본 법칙입니다. 죄에 대한 징벌은 후대로 연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에 대한 징벌을 받습니다. 이런 일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얼마나 자주 나타났습니까? 이스라엘의 역사와 첫 번째 범죄에서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모든 고통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인 것입니다. 그러나 “왜 무고한 자가 고난을 당하는가?”라고 말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답변으로 첫째는 무고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둘째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죄 뿐만 아니라, 넓게는 인류의 죄, 좁게는 우리나라나 사회나 가족의 죄의 결과들도 떠맡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개인이면서 동시에 국가의 일원이자 인류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개인으로서의 우리를 구원하지만, 이 말은 우리가 더 이상 국가의 일원이나 인류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죄를 짓지 않은 무고한 사람도 타인의 죄에 대한 징벌을 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전쟁을 통해서 죄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로울 때 우리는 죄를 가볍게 여기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존재와 인간의 본성속에 들어 있는 악의 가능성들을 보게됩니다.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이기심과 미움과 질투와 시기 그리고 매정함과 악의입니다. 이것들은 개인적인 생활 관계나 사회적인 생활 관계에서도 나타나며 민족적인 혹은 세계적인 규모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평화로울 때 자비롭고 사랑스런 하나님에 대해 복음을 거부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자신이 하나님 없이도 완전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쟁을 통하여 그에게 보여줍니다. 죄의 본질과 그 결과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똑같은 것도 하나님께서 사랑의 손길로 베푸실 때에는 반기를 거부하다가도, 고통을 매개로 하여 떠넘길 때에는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최종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고 극심한 고통을 당해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되면 탕자가 아버지와 집을 생각했던 것처럼, 우리의 어리석음과 우둔함을 통탄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전쟁을 허용하신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내와 오래 참으심입니다. 하나님은 왜 전쟁을 허용하시는가? 라는 질문보다 하나님은 왜 이토록 죄악에 물든 세상을 전멸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는 것일까? 하나님은 왜 무한한 은혜를 베풀어 이 세상의 악과 죄에 한계를 정하여 그것들이 통과하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치시는 것일까? 하고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대신 죽어서 우리를 구원하도록 사랑하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도록 우리를 벌하고 우리를 가르치며, 무엇보다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전쟁과 같은 일들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출처 : 문화와 설교연구원
글쓴이 : 백주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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