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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울의 사도적 자격[D.M.로이드존스]

새벽지기1 2016. 1. 19. 04:31
바울의 사도적 자격
롬1:1절

1. 바울의 사도적 자격
갈1:11~12절을 보십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는 다른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그는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사도는 자기가 전하는 진리는 어떤 인간적 교사를 통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에 의해서 자기에게 전해진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복음 메시지, 또한 그 모든 메시지에 대한 이해도 지상의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 열두 사도들을 가르치셨던 바로 그 주님에 의해서 직접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2. 사도권 계승의 문제
로마 카톨릭교회는, 교황의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주장할 뿐 아니라 사도적 계승성도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도의 표지가운데 진수적인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목격했다고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현재 살아 있는 사람 가운데 누가 그런 사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사도적 계승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기초하려고 전혀 노력하지 않고 유전에만 의존하려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실로, 우리가 성경적인 입장을 취하기만 하면, 규정상 그러한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도들은 권위 있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무오한 방식으로 말했다는 것을 저는 서슴없이 말씀드립니다. 그들은 능력과 메시지를 받아서 자기들을 보내신 부활하신 주님의 대표자들로서 그것을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들로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행한 것과 똑같이 분명하고 영감된 방식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알았습니다. 소스데네가 훌륭한 사람이었고 성도이기는 하지만 사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형제 소스데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또 다른 시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골로새서 1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디모데는 사도 바울이 아주 친애하는 사람이었음이 명백합니다. 그러나 그는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도 역시 ‘형제’입니다. 사도는 사람들을 사도로 만들겠다고 결심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디모데는 나의 뒤를 이을 사람이다. 그는 사도가 될 것이다. 수세기에 걸쳐서 그런 식으로 이 사도권이 이어져 나갈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빌1:1절과 대조해 보십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라고 묘사할 때는 자기와 디모데를 함께 싸잡아 말합니다. ‘종’의 문제일 때는 다같이 하나입니다. 그러나 ‘사도’라는 명칭을 사용 할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경우에는 구분합니다. 디모데는 종이었지만 사도는 아닙니다.
그 지위는 반복될 수 없습니다. 그 초대교회 이후 사도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라고 스스로 주장하면, 그것은 사도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신약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것입니다.

3. ‘택정함을 입었으니‘의 의미
이 말은 ‘구별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선(線)이 그어지고 사람들이 따로 구별됩니다. 그처럼 자기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따로 구별되었다고 말합니다. 회심전에 그는 어떤 류의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바리새인’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구별된 자’, 따로 떨어진 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분리시켰습니다. 그들은 거리로 나가서 길을 걸을 때도 다른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들은 옷자락이 다른사람에게 닿아 부정해지지 않도록 조심하였습니다 . 죄인들과 세리들과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바리새인입니다.

갈1:15~16절에서 자기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용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런 다음에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논의하지 아니하고’ 바로 그것이 그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는 어머니태로부터 그가 사도로 부름받기 전에 이 임무를 위해서 하나님께 택정함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레미야서 서론에서 자신에 관하여 그와 유사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로마서 9장에서도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언제요?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그들이 어미 태에 있을 때에서부터 하나님께 그렇게 구별되었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할 때,’ 그들이 이 세상에 나와서 어떠한 일을 행하기도 전에 그러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힘있는 교리를 대면하게 됩니다. 바울의 ‘소명’은 한참 생각하다가 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연한 사건들과 환경들이 그것을 발생시키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미리 아심과 경륜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사도가 바로 그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다소 사람으로 태어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또한 헬라 문화와 히브리 문화를 서로 같이 호기심있게 살펴보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로메 제국의 시민으로 태어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 중 어느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영원전에 세우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의 일부입니다.

이런 영원한 결정은 우리의 구원에도 해당됨을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처럼 영광스러우면서도 그처럼 우리를 겸비케 하는 것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나의 구원이 결정된 것은 창세 이전입니다. 창세 전에 우리의 이름들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써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놀랍고 기이한 일입니다. 영광스러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려다 보시며 하나하나 아신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이해하기로는 바로 그것이야말로 성경이 성결과 성화를 전하는 방식입니다. 이 모든 것을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향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친밀한 방식으로 우리를 아시고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만 하면, 어쨌든 그것은 나로 하여금 사도 베드로의 말을 사용하도록 효력을 발생합니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3:11~12절).

[언약교회 : http://cafe.daum.net/007bell]



출처 : 문화와 설교연구원
글쓴이 : 이종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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