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동산 이야기는 매우 짧고 단순하지만 크게 2막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막에서는 행복과 기쁨으로 가득한 에덴동산의 정경과 두 나무 이야기가 주축을 이루고 있고, 2막에서는 간교한 뱀이 등장하면서 뱀과 여자 사이에 긴장감 넘치는 대화가 펼쳐지고,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한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결국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이 비극의 한 가운데에는 뱀이 있습니다. 뱀은 2막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뱀이 많은 사람들을 헷갈리게 합니다. 갑자기 뱀이 나타나서 여자에게 말을 하니까 사람들이 의아해합니다. 아니, 왜 이야기가 갑자기 동화처럼 바뀌는 거냐고, 뱀이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의아해합니다. 그런데 뱀은 1막에 등장하는 두 나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생명나무나 선악을 아는 나무가 생명과 선악의 실체가 아니었던 것처럼 뱀도 악의 실체가 아닙니다. 단지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잘 드러내기 위해서 끌어온 하나의 표상입니다. 피조물 중에서 이야기의 내용에 가장 잘 어울리는 표상을 찾은 것이 바로 동산 중앙에 있는 두 나무이고 뱀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뱀이 어떻게 사람과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느냐는 문제로 고민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뱀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중에 가장 간교했습니다. 그 간교함과 사악함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듯이 성경은 뱀의 간교함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뱀으로 표상되는 악의 근원이 무엇인지, 언제부터 존재한 것인지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어요. 단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악의 씨가 인간 안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악이 인간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 밖에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죄가 인간 안에 내재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적으로 보면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고 있고, 어린 아이들도 천진난만하긴 하지만 하나 같이 자기중심적이고, 또 성경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교회에서도 원죄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 속에 악의 씨앗이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일반적인 추론을 완전히 부정합니다. 악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인간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담 안에서 죄가 나온 것이 아니고 아담 밖에서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아담이 죄의 씨앗이 아니고 뱀이 죄의 씨앗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모든 인간은 죄악의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원죄론이 말하는 것처럼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에 감염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는 진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안에 악의 씨앗이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뱀으로부터 악이 들어왔다고 말하지 인간 안에 죄가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컴퓨터 바이러스가 컴퓨터 프로그램 안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침입해 들어오는 것처럼 인간의 죄성도 인간 안에 내장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밖에서 침입해 들어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뱀으로 표상되는 사탄으로부터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죄에 대한, 인간의 죄성에 대한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죄의 씨앗인 뱀이 여자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어떤 부족함도 없이 가없는 행복과 놀라운 자유를 만끽하며 에덴동산을 돌보고 있는 여자에게 뱀이 다가와서는 대뜸 하나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은근슬쩍 물었습니다. 뱀은 자기가 마치 하와의 편인 것처럼, 하와를 대단히 위하는 것처럼 모양새를 취하고 있습니다. 자기 말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신 말씀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말한 게 아닙니다. 살짝 비틀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임의로 먹을 수 있으나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뱀이란 놈은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며 살짝 비틀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무한한 자유는 슬쩍 빼버리고 하나님이 금지하신 하나의 금령을 전체인 것처럼 탈바꿈시켰습니다. 그것도 물음의 형식으로 던졌습니다. 서술 형식으로 말하면 그것으로 말이 종결되기 때문에 물음의 형식으로 던짐으로써 여자로 하여금 스스로 그 말을 곱씹어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고도의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물론 묻는 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닙니다. 인간은 전지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알기 위해서는 물어야 합니다. 만물 중에서도 물을 줄 아는 것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물음은 가장 인간다운 행위이고, 가장 창조적인 행위입니다. 가장 완전한 배움의 행위입니다.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물어야 하고,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뱀이 던진 물음은 아주 사악한 물음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던진 물음은 진실을 탐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틀기 위함이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추락시키기 위함입니다. 여자를 넘어뜨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본래 논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러쿵저러쿵 이야기꺼리를 삼을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저 듣고 순종해야 할 분이지 분석하고 따져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뱀은 지금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꺼리로 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했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그것이 사실이냐고 물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논쟁의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여자와 뱀이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야기꺼리로 삼고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며 살짝 비틀어 말했습니다. 참으로 사악하고 간교한 접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뱀의 질문을 받은 하와는 뱀이 비튼 것을 교정해 줍니다. 하나님이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고,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고 교정해주었습니다. 하지만 하와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만 말씀했는데 하와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덧붙여 말했고, 하나님은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했는데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고 물타기를 했습니다. 물론 하와가 고의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고의적으로 했다면 이미 선악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아담과 하와는 아직 선악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했다고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말하지 못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해서 뱀은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덧붙이기도 하고, 적당히 물타기도 하는 걸 보면서 뱀은 여자에게 빈틈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입니다. 뱀은 때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이제는 아예 까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해버립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줄 하나님이 아시고 먹지 말라고 한 것’이라고 아주 대담하게 반박했습니다.
자, 뱀의 말을 잘 살펴보십시오. 뱀은 지금 하나님이 중요한 것을 숨기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하나도 숨긴 것이 없거든요. 오직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그들이 맘껏 생명을 향유하도록 하기 위해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금하신 것이거든요. 그런데 뱀은 하나님이 선악을 아는 지식을 혼자 독점하려고 그런 것처럼, 아담에게 말하지 않은 딴 생각이 있는 것처럼, 중요한 진실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꾸몄습니다. 더욱이 뱀은 선악의 실체를 뒤집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악의 실체가 죽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했는데 뱀은 선악의 실체를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선악을 아는 것이 마치 하나님만의 특권인 것처럼, 하나님만의 탁월한 능력인 것처럼, 선악을 알게 되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선악의 실체를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선악을 아는 것이 죽음이라는 진실은 감추고 매우 좋은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나님처럼 되는 지름길인 것처럼 속였습니다.
이처럼 뱀은 비슷하기는 한데 다르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기는 하는데 약간 비틀어서 말했습니다. 매우 간교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흐리게 하고, 말씀의 권위를 약화시켰습니다. 여자를 혼돈에 빠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여자가 혼돈에 빠진 틈을 비집고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뒤집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아주 확고하고도 과감하게 늘어놓았습니다. 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고, 죽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처럼 된다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뱀의 속성이고, 뱀이 사용하는 기본 전략입니다.
뱀의 이런 전략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교회 안팎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장난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실상은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자들, 하나님의 말씀하고 비슷한 것 같은데 실상은 다른 이야기들이 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지 않은 것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남발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변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단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회 설교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의교회 고 옥한흠 목사님도 은퇴하고 나서 고백했습니다. 부자 성도들이 있어서 하나님 말씀을 정직하게 전하지 못했다고, 그들의 귀에 거슬릴까봐 하나님 말씀을 절반밖에 전하지 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만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장난치는 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저도 하나님 말씀을 충직하게 증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믿음과 용기도 부족하고, 하나님의 영에 붙잡혀 있지도 못하기 때문에 설교하고 나면 항상 부족함을 느낍니다.
성도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 말씀에 목마른 자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들으려 하는 자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틀었던 뱀의 말에 솔깃했던 것처럼, 오늘 이 시대의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듣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적당히 조미료를 뿌린 것을 좋아합니다. 허망한 소리에 마음과 영혼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지 않은 것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정직하게 듣고 가르쳐야 할 자들은 말씀 위에 앉아서 자기들 입맛에 맞게 적당히 주무르고 있고, 성도들은 듣기에 달콤한 것을 들으려 하기 때문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리지만 사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과 유행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답시고 돈과 성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의 차이가 없고,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오늘날 교회의 실상을 예수님과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존귀한 인간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 한복판에서는 결코 높은 인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정, 영향력, 명예, 성공과 같은 것들은 그분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분의 자리는 인생의 양지에서 정상에 오른 유명 인사들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분의 나라는 인간의 가장 작은 나라도 지니고 있는 광채와 권력과 확장과 지속성조차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연이어 교회에 대해 말했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분의 연약함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건과는 달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과는 달리 교회는 전적으로 연약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교회가 나그네가 아닌 것처럼 행세한다면, 교회가 세상 속에서 천막을 치지 않고 큰 예배당과 베드로 성당을 짓기 시작한다면, 이런 것들은 언제나 허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역할은 교회와 어울리지 않으며, 이런 일은 실제로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이런 역할을 하려고 한다면 불행하게도 세속적인 집단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분투하고 있습니다. 더 큰 부와 명예와 광채와 영역 확장을 위해 질주하고 있습니다.
전에 미국의 상원의회 목사였던 리처드 핼버슨은 교회의 변천을 아주 짧고 명쾌하게 정리했습니다. “처음에 교회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사람들의 교제 모임이었다. 그러나 그 후 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하여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옮겨가서는 제도가 되었다. 그 다음에는 유럽으로 넘어가서 문화가 되었다. 마침내 미국으로 왔을 때 교회는 기업이 되었다.”(하나님을 팝니다. 18쪽).
그렇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기업 정신에 물들어 있고, 그리스도인들은 자본주의 정신에 물들어 있습니다. 목회자는 소비자인 성도들의 필요와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마치 돈의 주인인 것처럼, 하나님을 잘 믿으면 만사가 형통하고 사업이 번창하고 사회적인 성공을 하게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그런 말을 하나님의 약속이라도 되는 듯이 철석같이 믿고 매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폼이고, 십자가는 장식품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여러분, 이건 뭘 말해줍니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뱀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뱀의 실체인 사탄의 전략에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근본적인 전환을 해야 합니다. 말뿐인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는 신앙으로, 나의 욕망을 추구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말씀을 비트는 신앙이 아니라 말씀에 순명하는 신앙으로, 세상에 순응하는 신앙이 아니라 세상을 거스르는 신앙으로 혁명적인 전환을 해야 합니다.
비슷한 것은 가짜입니다. 하나님 말씀 비슷한 것은 하나님 말씀이 아닙니다. 생명 비슷한 것은 생명이 아닙니다. 믿음 비슷한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비슷한 것은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뱀이 던져놓은 덫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비슷한 것에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약속 아닌 것에 목매달지 마십시오. 사람의 말은 무력하고, 사람의 약속은 허망할 뿐임을 잊지 마십시오.
여기서 한 가지 상상을 해봅시다. 하와가 만일 하나님의 말씀에만 집중했다면, 그래서 뱀의 간교한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상황은 어떻게 됐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정녕 에덴에서 쫓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악을 알지 못한 채로 계속해서 에덴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 말씀에 집중한다면, 하나님 말씀에 정직하게 순종한다면 우리 삶이 어떨 것 같습니까? 세상의 눈으로 보면 미미하고 실패한 것처럼 보이고,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인생처럼 보일지 모르나 하나님의 눈 - 말씀의 눈으로 보면 정녕 에덴의 삶을 살 것입니다. 인생의 항해는 힘겨울지 모르나 그의 내면과 영혼은 샬롬으로 충만할 것이고, 전체적인 삶의 결은 지극히 평온할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인생길을 가볍게 걸어갈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말씀에 집중했던 예수님이 그랬듯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말씀에 집중하는 그리스도인의 삶도 정녕 그럴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지 않는 자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대단히 화려하고 성공한 것처럼 보이고,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인생처럼 보일지 모르나 하나님의 눈 - 말씀의 눈으로 보면 결코 에덴의 삶이 아닙니다. 인생의 항해가 즐거울 수는 있지만 그의 내면과 영혼은 번민으로 가득하고, 전체적인 삶의 결은 지극히 불안정하고 피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인이 아니라 우상의 종노릇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양은 갖출지 모르나 생명을 살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그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자는 모래 위에 그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진실로 그렇습니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갈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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