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창세기2:8-17)

새벽지기1 2015. 12. 29. 06:53

우리는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를 통해서 생명의 근원이 인간 안에 있지 않다는 진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선악을 아는 나무를 살펴보려 합니다. 우선 왜 나무 이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일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려 합니다. 이 나무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부른 것은 그 열매에 선악을 알게 하는 어떤 특별한 기능이 있고 때문이 아닙니다. 이 나무와 관련된 이야기의 내용이 선악을 아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과 선악을 아는 것이 서로 함수관계로 엮어 있기 때문에 선악을 아는 나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선악을 아는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우선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금령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이 선악을 알면 안 되기 때문일까요? 인간이 선악을 아는 것을 원치 않아서일까요? 네. 일차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을 아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금령이 정말 금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금령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선악과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은 단지 선악과를 금한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생명나무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처럼 선악과도 하나의 상징입니다. 아담이 피조물이라는 근본적 진실을 잊으면 안 되니까 그것을 기억시키기 위한 상징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금령이 진짜로 말하는 것은 단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금령은 곧 한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담아, 너는 피조물이다. 피조물은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어. 그리고 동산 중앙에 있는 저 선악과가 바로 너의 한계선이야. 그러니 저 한계를 넘어가지는 말라. 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맘껏 할 수 있지만 저 한계선을 넘어가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물론 성경이 직접 그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악과 금령을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는 진짜 내용은 ‘너는 피조물이니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아담에게는 어떤 형태든 금령이 있어야 됩니다. 선악과 금령이 없었더라도 다른 형태의 금령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비록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고, 자신의 뜻대로 무엇이든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부여받긴 했지만, 그래도 변할 수 없는 진실은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담이 피조물인한 한계가 없으면 안 됩니다. 피조물의 본질은 한계가 있다는데 있습니다. 여러분, 창조자와 피조물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이겠습니까? 창조자는 한계가 없고, 피조물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 바로 창조자와 피조물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그리고 바로 한계를 기억시키기 위해 등장한 것이 선악과 금령입니다.

 

물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선악을 아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성경이 그 나무를 ‘선악을 아는 나무’라고 이름 붙인 것은 그 열매를 먹는 것과 선악을 아는 일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악을 아는 것이 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선악이 무엇입니까? 선악의 문제는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매우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선악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선은 히브리어로 ‘토브’이고, 악은 ‘라’입니다. 그런데 ‘토브’는 ‘선’이라는 뜻만 아니라 ‘충만한 기쁨’이라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또 ‘라’는 ‘악’이라는 뜻만 아니라 ‘충만한 고통’이라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선과 악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윤리적 차원의 선과 악을 넘어섭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과 악은 인간 생활에 나타나는 가장 깊은 불화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정확한 이해입니다.

 

조금 자세하게 이야기해봅시다. 선과 악은 언제나 함께 짝지어 존재합니다. 물론 선과 악은 분명히 다릅니다. 선과 악은 서로 대립됩니다. 하지만 선과 악은 서로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조금만 관찰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쁨이라는 것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고통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기쁨을 경험하지 않았으면 고통을 알 수가 없습니다. 추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면 추함도 알 수 없습니다. 배부름을 알지 못하면 배고픔도 알 수 없습니다. 반대로 고통을 알지 못하면 기쁨을 알 수가 없고, 추함을 알지 못하면 아름다움을 알 수가 없고, 배고픔을 알지 못하면 배부름을 알 수가 없습니다. 빛만으로는 빛을 알 수가 없어요. 빛은 어둠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어둠은 빛이 있기 때문에 어둠일 수 있습니다. 색깔도 그렇습니다.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은 색깔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빨강색이 어떤 색인지, 노랑색이 어떤 색인지를 구별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아예 색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겁니다.

 

사실입니다. ‘토브’와 ‘라’는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라’가 없는 순수한 ‘토브’, ‘토브’가 없는 순수한 ‘악’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선과 악이 뿌리가 다르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선과 악은 한 혈통입니다. 선과 악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어놓은 경계선 -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경계선을 넘어가는 순간 선과 악이 동시에 발생했다고 말합니다. 성경이 그 나무를 ‘악의 나무’가 아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부른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선과 악은 하나의 나무이지 서로 다른 두 개의 나무가 아닙니다. 선과 악은 두 얼굴을 가진 한 몸입니다.

더욱이 선악을 안다는 것은 선과 악에 대해 개념적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을 안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선과 악이라는 대립과 갈등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선함 속에 악의 손길이 작동할 수밖에 없고, 우리가 행하는 악함 속에 선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있는 선은 고작 악으로부터 빠져나온 선, 악을 통과한 선이지 악이 배제된 선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악을 안다’는 말이 담고 있는 내용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진실을 아셨습니다.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현재의 삶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선악을 알기 이전에는 아담의 존재와 삶에 어떤 분열도 없었습니다. 존재도 통합된 하나였고, 삶도 통합된 한 덩어리였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고 나면 더 이상 그런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선악을 알게 되면 존재와 삶이 갈등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존재에도 내적인 균열이 생기고, 내적 갈등으로 인해 삶이 갈기갈기 찢어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선악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악의 유혹과 공격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양심을 가책으로 고통당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악의 유혹과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선을 행할 수가 없고, 양심의 가책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악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을 행하면서도 온전히 기뻐할 수가 없고, 악을 행하면서도 온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선을 행하면서도 찜찜하고, 악을 행하면서도 찜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선악을 아는 자의 운명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의 삶을 가리켜 성경은 ‘죽음’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사태의 진실을 아셨습니다. 아담은 아직 선악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선악을 아는 것이 어떤 사태를 야기할 것인지를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를 ‘선악을 아는 나무’라고 명명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악을 아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결과와 관련된 것이지 선악과를 먹지 말아야 할 이유와 관련된 것은 아니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죽음입니다. 성경은 놀랍게도 죽음을 선악을 아는 삶과 하나로 봅니다. 선악을 아는 삶이 바로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했던 그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선악을 아는 것과 죽음은 사실상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내용은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존재가 없어져버리는 존재의 멸절이 아닙니다. 만일 죽음이 단지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라면, 생물학적으로 숨이 정지하는 것이라면 굳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그게 아니기 때문에 죽음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없으나,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을 뜻합니다. 육체가 생명활동을 멈추고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추방된 자, 상실된 자, 저주를 받은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은혜로 받지 못한 채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살아야만 하는 삶을 뜻합니다. 선물받은 삶이 아니라 명령받은 삶을 뜻합니다. 선과 악이 얽혀 있는 삶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이 바로 이런 것이기 때문에 죽음은 끔찍한 것입니다. 죽음은 저주받은 것입니다. 죽음은 한없이 비참하고 무겁고 잔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지금 생명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적으로 보면 생명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칙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지 않은 자들은 생명을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죽음을 살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런 자들의 인생은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그 실상은 죽음입니다. 끝없는 갈등과 번민을 끌어안고 살고 있습니다. 선과 악 사이에서 갈지 자 걸음을 걷고 있습니다. 살아야만 하는 삶,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삶, 견뎌내야만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너를 죽여야 하는 삶,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어야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비록 구원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리스도인들도 선악의 세계를 완전히 넘어서지는 못했습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세계가 선악을 아는 세계이기 때문에 선악을 아는 자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주 엄격하게 말하면, 이 땅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정녕 죽으리라’고 했던 바로 그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선악을 아는 자의 삶입니다. 이 삶은 선악을 알지 못하는 에덴에서의 삶과는 전혀 다릅니다. 선악을 알지 못하는 삶과 선악을 아는 삶은 모든 것이 다릅니다. 삶의 내용도 다르고, 삶의 차원도 다르고, 생명의 결도 다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다음 곧바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에덴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에덴동산에서 추방하는 상징적인 조치를 한 것입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선악의 세계는 곧 죽음의 세계입니다. 그런 면에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금령은 인간의 삶이 죽음의 세계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들어서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선악과가 없었더라면 에덴동산에서 계속 룰루랄라 신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선악과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인간이 이 고생을 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렇게 하소연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짓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피조물은 한계 안에서만 피조물로서의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개가 멈추지 않고 계속 성장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과나무와 감나무가 계속 자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닷물이 일정한 한계를 지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피조물은 한계가 있어야 합니다.

 

특히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더더욱 한계가 있어야 합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에게 한계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에 그보다 더 무섭고 황당한 일은 아마 없을 겁니다. 하여, 하나님은 아담에게 한계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셔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너의 한계다. 이 한계선을 넘어가지 말라. 이 한계선을 넘어가면 너는 선악을 알게 될 것이고, 선악을 알게 되면 너의 삶은 더 이상 생명을 살지 못하고 죽음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한계선을 잘 지켜라.’ 바로 이것이 선악과 금령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잘못입니까? 하나님이 뭐 엄청난 잘못을 하신 건가요? 인간을 악으로 유혹이라도 하신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로 인간을 테스트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한계선을 그어 놓고 그걸 넘어가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최대한의 배려를 하신 것이고, 최대한의 대접을 하신 것이지 인간을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의 덫을 놓은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아담의 한계를 상징하는 선악을 아는 나무는 에덴동산 중앙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담의 존재 중심에 그 한계가 있다는 것을 뜻입니다. 존재의 변두리가 아니라 존재의 중심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뜻입니다. 그런데 존재 주변에 있는 한계도 있습니다. 인간적인 능력의 한계, 육체적인 한계, 환경적 한계, 사회적인 한계 등 여러 가지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한계에 대해서는 끝없이 도전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활성화시키는 원동력이고 세상을 살리는 힘이기도 합니다. 자기 한계에 도전하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며 멋진 일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한계에 도전했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가 이만큼 승리하고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존재 중심에 있는 한계, 창조자가 그어놓은 한계에 도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 한계는 노력한다고 해서 극복되는 게 아닙니다. 부정하고 없앤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 한계에 도전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며 스스로를 죽이는 일입니다. 자기 삶을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한계는 겸손히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이 한계는 멍에가 아니라 은총이기 때문에 감사히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이 한계 안에서 사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피조물에게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이 원칙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이미 선악을 아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이 원칙은 유효합니다. 지금도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한계를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존재 주변에 있는 한계에는 도전하는 용기가 있어야 하겠지만 존재 중심에 있는 한계에는 굴복할 줄 아는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존재 중심에 있는 한계를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날마다 하나님의 왕 되심과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분에게만 궁극적 생명, 궁극적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궁극적 희망을 그분에게 거는 겁니다. 궁극적 생명을 그분 안에서 발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물학적 생명, 사회적 차원의 생명을 상대화시키고, 세상을 사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그것에 목매달지 많고, 그것을 우상화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절대성, 하나님 앞에서만 누릴 수 있는 생명이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나의 한계를 인정하는 지혜입니다. 날마다 이 진실을 기억하면서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죽음을 사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지 않아도 생명을 호흡하며 살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