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치명적인 유혹(1)(창세기3:1-7)

새벽지기1 2015. 12. 31. 07:57

우리는 앞에서 뱀과 여자의 대화를 살펴보았습니다. 뱀이 여자를 넘어뜨리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나왔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기막힌 간교함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뱀과 여자의 대화중에서 치명적인 유혹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선악과에 얽힌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점검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뱀은 여자에게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뱀이 말한 것은 세 가지입니다. 죽지 않는다, 눈이 밝아진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 이야기는 하나하나가 엄청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봅시다. 죽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생명이 가장 뜨겁게 갈망하는 최고의 생명본능입니다. 인간을 비롯해서 모든 생명은 죽기를 원치 않습니다. 사는 것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다 해도 모든 생명은 살기를 원합니다. 자살을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생명은 본능적으로 죽음에 항거합니다. 화살이 날아오면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는 것이라든지, 뜨거운 그릇에 손이 닿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움찔한다든지 하는 게 다 살기 위한 생명시스템입니다. 먹이사슬이 지배하는 정글에서도 살기 위한 몸부림은 처절합니다. 양이나 소가 무리를 이루는 것이라든지, 들개가 효과적으로 먹이 사냥을 하기 위해 협동작전을 한다든지 하는 것도 다 살기 위한 방편입니다. 동물뿐 아닙니다. 식물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겨울을 앞두고 나무들이 잎을 떨어뜨리는 것도 살기 위한 전략입니다.

 

자기 생명에 대해서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모든 생명은 종족을 보존하고 퍼트리기 위해서도 악전고투를 합니다. 얼마 전에 ‘남극의 눈물’이라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영하 4-50도 되는 혹한의 남극에서 살아가는 펭귄들의 모습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조금만 실수해도 알이 금방 얼어버리기 때문에 발등에 알을 올려놓고 자기 몸으로 알을 품는 인고의 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알에서 깨어 나온 새끼들을 키우기 위해 자기 몸에서 소화된 물질을 꺼내 먹이는 걸 보면서 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또 시속100-200키로 미터로 부는 강추위가 밀어닥칠 때에는 수백 수천마리 펭귄들이 겹겹이 서로를 둘러싸고는 순서대로 안과 밖을 교대하는(허들링) 기막힌 지혜와 협동을 보면서 생명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지난한 헌신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살고자 하는 의지는 정말 감동적인 생명의 본능입니다. 생명에 없어서는 안 되는 절대 조건입니다. 만일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살고자 의지가 없다면 모든 생명은 이내 곧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갖가지 역경을 뚫어가며 살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간 이식을 해야 하는 현실 앞에 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아들의 생명에 위해를 가할 수도 있는 상황 앞에서 심각한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과연 이렇게까지 하면서 꼭 살아야 하는가?’라는 절박한 물음을 놓고 깊이 시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몇날 며칠을 시름하면서 발견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살고자 하는 의지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모든 생명을 위해 주신 최상의 선물이라는, 모든 생명이 살기 위해 저토록 간절하게 몸부림치는 것은 단지 한 생명의 의지라기보다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의지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연이어지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사악한 것도 아니고, 치사한 것도 아니고, 이기적인 것도 아니라는 생각,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생명의 고유한 현상일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의지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 후부터 저는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을 치사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매우 자연스러운 생명의 현상이라고 봅니다.

 

어쨌든 모든 생명에게는 살고자 하는 의지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어땠을까요? 그 당시의 아담과 하와는 아직 죽음을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과연 살고자 하는 의지가 제대로 작동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만, 저는 아담과 하와도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작동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시할 수 있는 증거도 있습니다. 아담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죽음이 비록 경험적 현실은 아니었지만 가능성으로서 아담 앞에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죽음을 아예 몰랐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죽음이라는 건 피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만일 생명의지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면 죽는다는 경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정녕 죽으리라’는 경고가 의미 있으려면 살고자 하는 생명의지가 작동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뱀의 말을 들어봅시다. 뱀은 하와에게 ‘너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와 앞에 놓여 있는 죽음의 가능성을 아예 제거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죽음의 가능성을 예고하셨는데, 뱀은 죽음의 가능성을 아예 부인했습니다. 하와는 지금 전혀 다른 두 가지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죽음의 가능성을 말하는 메시지와 죽음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자, 이 때 하와의 마음이 어땠을 것 같습니까? 죽음의 가능성을 말하는 메시지와 죽음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메시지를 들으면서 하와는 어떤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까? 정확하게는 말할 수 없지만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한 것을 보면, 죽음의 가능성을 말하는 메시지보다는 죽음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메시지에 더 마음이 끌렸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뱀의 말이 귀에 거슬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귀가 번쩍 뜨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모든 생명에게 최고의 희소식은 죽지 않는다는 소식일 테니까 말입니다. 뱀이 노린 게 바로 그겁니다. 모든 생명이 가장 뜨겁게 갈망하는 생명의지,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내기를 갈망하는 뜨거운 생명의지를 노렸습니다. 그래서 ‘너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속삭인 것입니다. 사실 그냥 듣기에는 얼마나 은혜로운 말입니까? 귀가 번쩍 뜨이는 축복의 말이지 않습니까? 죽음의 가능성을 이야기한 하나님보다도 훨씬 은혜롭고 따뜻하고 소망이 넘치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여자를 죽음에 빠뜨리기 위한 사악한 꼼수였습니다. 여자를 유혹하기 위한 미끼였습니다.

 

뱀은 지금도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모든 생명, 모든 인간이 갈망하는 최고의 희망이 죽음 없는 영생이기 때문에 사탄은 오늘도 죽지 않는다는 희망찬 소식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모든 종교, 모든 이단을 보십시오. 다들 자기에게 영생이 있다고 떠듭니다. 영생을 얻는 길이 자기에게 있다고 떠듭니다. 물론 예수님도 죽음을 넘어선 생명을 약속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약속했습니다(요11:25-6). 바울도 부활 생명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의 수고도 헛되다고 말하면서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15:14,53).

 

그러나 말이 같다고 해서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예수도 영생을 약속하고, 뱀도 영생을 약속하고 있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실이고, 뱀의 말은 거짓입니다. 왜 똑같은 것을 말하는데 한쪽은 진실이고 한쪽은 거짓이냐고요? 생명의 주인이 생명을 약속하는 것은 진실이지만 생명의 주인이 아닌 자가 생명을 약속하는 것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봅시다. 대통령이 기름값을 리터당 500원 내리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약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청 공무원이 기름값을 리터당 500원 내리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황당한 거짓일 뿐입니다. 이처럼 말은 똑같지만 말이 똑같다고 해서 꼭 같은 말인 것은 아닙니다. 말은 똑같지만 말하는 사람에 따라 진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뱀의 말은 명백한 거짓입니다.

 

뱀은 달콤한 거짓을 미끼로 던졌습니다.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죽지 않는다는 매혹적인 미끼를 던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생을 미끼로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복음서를 잘 살펴보십시오. 예수님은 한 번도 영생을 미끼로 던진 적이 없습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했지 영생을 얻기 원하는 자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비슷한 것 같지만 아주 다른 말입니다. ‘나를 따르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과 ‘영생을 얻으려면 나를 따르라’는 말은 비슷한 것 같아도 그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앞의 말은 진실이고, 뒤의 말은 미끼입니다. 앞의 말은 예수가 중심이고, 뒤의 말은 영생이 중심입니다. 전혀 달라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한 번도 후자의 방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할 게 있습니다. 복음이 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은 곧 예수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영생이 아니고 예수입니다. 하나님나라의 핵심도 영생이 아니고 예수입니다. 예수가 복음이고, 예수가 구원입니다. 예수가 복이고, 예수가 생명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입니다. 영생이라는 기막힌 축복, 최대의 욕망을 놓고 하나님과 거래하는 거예요. 이것은 전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은 영생을 얻기 위해 부처를 믿는 것이나, 영생을 얻기 위해 산신령을 믿는 것이나 사실상 똑같은 신앙입니다.

 

물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예수 믿는 것과 영생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근원 생명을 약속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예수의 부활에 참여했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부활 생명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영생에 매달리면 안 됩니다. 병고침이나 영생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것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인간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병고침을 강조하고, 문제 해결을 강조하고, 영생을 강조하는 자들은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스님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영생, 병고침, 문제 해결을 강조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병고침을 받은 자들에게 오히려 당부하셨습니다. 제발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병고침 받았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여러분, 왜 그랬겠습니까? 이유는 분명합니다. 사람들이 병고침 받기 위해 나오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사랑으로 치유하셨습니다. 각종 병든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치유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병고침을 받기 위해 나오는 것은 원치 않았습니다. 나는 모든 병을 치유하는 능력 있는 자라고 외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병고치는 것 가지고 사람들을 모으지 않았습니다.

 

영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영생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나오는 것은 절대 원치 않으십니다. 그런 자들에게 주님은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영생은 신앙의 결과이어야지 신앙의 목표가 되면 안 됩니다. 영생이나 병고침이나 부귀영화가 신앙의 목표가 되면 그 순간부터 신앙은 타락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신앙이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으로 변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따르는 것은 그분이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세상의 주인이시고,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 영생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고, 피조물이 창조자를 의뢰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생명이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예, 이것이 전부입니다.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이것 외에 다른 이유가 있다면 - 그것이 영생이든지, 병고침이든지, 부귀영화이든지, 만사형통이든지, 마음의 평안이든지, 세계 평화이든지, 영혼 구원이든지 간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예수를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이고, 신앙을 도구화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바로 뱀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뱀의 방식을 따르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죽음의 가능성을 이야기한 하나님보다 훨씬 은혜롭고 따뜻하고 소망이 넘치는 말을 했던 뱀처럼 오늘날 교회 안에도 매우 은혜로운 말, 귀가 번쩍 뜨이는 축복의 말, 하나님보다 훨씬 은혜롭고 따뜻하고 소망이 넘치는 말을 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메시지를 들어보십시오. 하나님과 빅딜을 하라고 부추기는 내용이 정말 많습니다. 예수 믿으면 영생을 얻고, 예수 믿으면 병고침을 얻고, 예수 믿으면 부귀영화를 얻고, 예수 믿으면 만사가 형통한다는 이야기를 쉬지 않고 합니다. 축복을 받으려면 예수를 잘 믿어야 한다고 강변합니다. 물론 전적으로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하나님과 거래하라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다 뱀의 자식입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는 자입니다. 물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일인지조차 모르는 자들도 있습니다. 자기가 선포하는 메시지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뱀의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모르는 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뱀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뱀이 했던 것처럼 미끼를 던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 교회 안에 미끼꾼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미끼를 던지지 않았는데 예수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자들 중에는 미끼를 던지는 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에덴동산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와 뱀의 메시지. 하나님은 아담에게 죽음의 가능성을 말했습니다. 뱀은 하와에게 죽음의 가능성을 전면 부인했습니다. 결코 죽지 않는다고 기막힌 소식을 전했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도 이 두 가지 메시지가 뒤섞여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만 들리는 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만 뱀의 말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듣지 않으려 해도 뱀이 쉬지 않고 속삭이기 때문에 듣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소리와 뱀의 소리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아주 정직하게 말하면 뒤섞여 있는 정도가 아니라 뱀의 소리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모기 소리처럼 작고, 뱀의 소리는 천둥처럼 크고 강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하와가 하나님의 메시지와 뱀의 메시지를 듣고 고민하다가 결국 뱀의 소리를 뒤쫓아 갔던 것처럼 오늘날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과 뱀의 소리 중에서 머뭇거리다가 결국은 뱀의 소리를 뒤쫓아 가고 있습니다. 물론 성도들은 그게 무슨 소리냐며 펄펄 뛸 겁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만 붙잡고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고 항변할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항변해도 그게 사실입니다. 목회자와 성도들 대부분이 뱀의 소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도 뱀의 소리를 추종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알고도 따르는 부분이 있고, 모르고 따르는 부분도 있습니다. 정말 과감한 변혁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정직하게 마음 기울여 듣고, 정직하게 따라가는 과감한 변혁이 필요합니다. 주의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을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