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틸리케(Helmut Thilicke)가 말합니다.
“사탄은 뻐꾸기처럼 자신의 알을 신앙의 둥지에 떨어뜨려 놓는 재주가 있다.
그 부패한 은혜가 풍기는 악취와 비교하면 지옥의 유황불 냄새는 아무 것도 아니다.”
부패한 은혜란 무엇일까요?
필립 얀시의 지인知人 중 최근 이혼한 여자가 딸과 함께 교회 본당 앞에 서 있었습니다. 평소 말조차 건네 본적이 없는 사모가 다가오더니 “이혼하셨다구요. 이해가 안 가는군요. 자매님이나 남편이나 모두 예수님을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매몰찬 면박에 기가 질린 그녀는 필립 얀시에게 말했습니다. “저나 남편이나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데도 우리 부부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아 망연자실하던 차였습니다. 제가 필요한 것은 조언과 위로였는데....”
상대방의 아픔과 고뇌는 들어줄 생각조차 안하고, 시원찮다고 믿음을 비난하거나 단답형 답만 던져 줍니다. 자신이 상대방보다 신앙적 우위優位에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은혜는 부패하여 악취가 나기 시작합니다. 로버트 웬버그 교수는, “기도해 보라는 뻔한 대답 말고”라는 책을 썼습니다. 정말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의 뻔한 모범답안에 지쳐있습니다. 해결 방안이 없다면 상대방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헤밍웨이는 부패한 은혜가 무엇인지 잘 알았습니다.
그의 가정은 대대로 기독교를 믿는 가정입니다. 믿음 생활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그의 어머니에게 아들의 자유로운 삶이 방종으로 비춰졌습니다. 아들이 자기 눈에 띄는 것조차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생일날, 어머니는 케익과 함께 아버지가 자살할 때 쓴 권총을 보낸 일도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인데 심한 우울증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어머니의 편지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자식은 세상에 태어날 때 부모라는 통장을 받고 나온다. 자라는 동안 자식들은 인출만 한다. 그러나 그 통장을 다시 채워놓는 것이 자식 된 도리다.” 이어서 통장을 채워놓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나열하였습니다. 어머니께 수시로 선물하기, 청구서 대신 내주기 등등. 특히 강조한 것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의무 이행”이었습니다.
헤밍웨이는 아버지의 불행이 어머니 때문이라 믿었으며, 어머니와 어머니의 구세주에 대한 미움을 끝내 버리지 못했습니다
놀랍게도 부패한 은혜의 악취는 잘 믿는다는 사람들에게서 난다는 점입니다.
왜 스스로 잘 한다고 생각하는 종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부패시키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타락한 인간의 종교성에서 연유한 뿌리 깊은 원인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인간들은 불가항력의 상황에서 그 배후에는 큰 힘이 있음을 감지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힘에 여러 이름들을 붙여서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것이 종교의 기원입니다. 종교의 공통점은, 그 신들을 한결같이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 신들을 잘 달래고 잘 섬겨서 복을 얻고 액운과 불행을 면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노력에는 차이가 나게 마련입니다. 잘하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결과 계급이 생깁니다. 높을수록 신의 인정을 받은 것으로 자타가 생각합니다
.
신들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신들의 엄위에 반응하였다는 것입니다. 신들의 엄위에 반응하는 이러한 종교들은 엄청난 폐해를 낳습니다. 종교 엘리트들은 절대 권력으로 신도들 위에 군림하며, 신도들로 하여금 뜻도 잘 모르는 각종 종교 행위에 몰두하게 만듭니다.
각종 종교 행위들을 이성적으로 판단해 보십시오. 자해自害를 한다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종교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죽은 고승의 시신에 덧칠을 하여 등신불로 만들고는 참배를 합니다. 그리고 감탄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을 그렇게 했다가는 감옥행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를 잃어버리고는 엉터리 신들을 두려움으로 섬기며 몽매의 길을 가는 것을 두고 보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와 경륜과 생각과 마음과 성품을 성경을 통해 온 세상에 알리셨습니다. 그 핵심은 한 마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입니다. 하나님의 엄위는 다른 신들의 엄위와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다른 신들의 엄위는 심술이지만 하나님의 엄위는, “그래서는 제대로 살 수 없어!”라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제발 잘못했다고 벌 받을까 전전긍긍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돌아오시면 됩니다.
뉘우치며 돌아오는 당신을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기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비(사랑)’에 반응하지 아니하고 다른 종교들처럼 ‘엄위’에만 반응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엄격하고 무서운 분으로 여겨, 싫어하신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2,134개나 되는 율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들이 왜 그랬는지, 독재국가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독재자는 국민들을 사사건건 통제하고 비례하여 수많은 법들을 제정합니다. 그리고는 독재자는 자신이 가장 옳다고 착각하며 살고, 그 부하들은 권한을 사정없이 휘두릅니다. 제사장 그룹과 바리새인들이 행한 일들도 똑같아, 일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대신 종교의 무거운 짐들을 지웠습니다
.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도 목사는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며,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여러 조건을 달아 팔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지의 모든 불이 꺼지는 대참사입니다.
세상은 은혜에 굶주려 있습니다. 만약 교회에서 은혜를 찾을 수 없다면, 세상 어디에서 그 은혜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한 집사님이, 우리 교회의 좋은 점이 뭐냐는 질문에, “차별이 없어 마음이 너무 편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다시금 제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고전 10:12)
어려울수록 낮을수록 힘이 없을수록 대접받는 교회, 도움을 주고 절대로 생색내지 않는 교회, 높을수록 많을수록 더 많은 일을 조용히 따뜻하게 행하는 교회, 진짜 은혜가 넘치는 교회로 만들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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