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스크랩] 믿음의 뿌리를 찾아서-정병선 목사

새벽지기1 2015. 8. 16. 16:41

 

믿음의 뿌리를 찾아서

 

창세기 15장은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도 가장 중요한 장이고, 믿음의 본질이라는 측면에서도 아주 중요한 장입니다. 창세기 15장은 14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람은 롯을 구출하는 전쟁에서 당당하게 승리했습니다. 가난안 남부의 5나라를 초토화시킨 막강한 연합군과 맞서 싸워 승리를 하고, 롯과 소돔 사람들을 구출해냈습니다. 더욱이 아브람은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승리한 자에게 돌아오는 노획물을 실오라기 하나 건들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전쟁에서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순결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아브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브람이 그때에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걸 반증합니다. 아브람은 분명히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에게 승리를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왜 두려워했을까요? 하나님에게 승리의 영광을 돌렸고, 소돔왕의 제안까지도 거절하는 믿음의 순결함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왜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일까요?

 

우리는 그 배경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짐작해볼 수는 있습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거대한 승리를 한 이후에 허탈함과 두려움에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정상에 올라섰을 때 공포와 두려움에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승리의 순간에 느끼는 짜릿함과 황홀함, 자신감에 들뜨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가면 이내 곧 허탈함과 두려움에 빠집니다.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물론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근본적인 공포와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도 죽기 살기로 함께 모여 사는 것도 마음 깊은 곳에 공포와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고, 캄캄함 밤길을 홀로 걸을 때, 거대한 우주 앞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보았을 때, 깊은 산 속에 홀로 있을 때 공포와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도 마음속에 근본적인 공포와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과 공포는 평상시에는 마음 깊은 곳에서 잠자코 지냅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면 일상생활 자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순한 양처럼 의식 아래에 묻혀 지냅니다. 그러다가 평상시와 다른 상황을 만나게 되면 한 순간에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납니다. 강도를 만나거나, 전쟁이 나거나, 불이 나거나, 아주 처절한 패배를 당하거나, 사악한 권력에 짓밟힐 때에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납니다. 정반대로 거대한 승리를 했을 때, 권력의 최정점에 섰을 때에도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납니다. 참 묘하지요? 분명히 승리를 했습니다. 최고 권좌에 올랐습니다. 더 이상 무엇도 두려워할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때에도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아브람이라고 달랐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람 속에도 근원적인 공포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가나안까지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 속에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더더욱 두려움과 공포가 강하게 엄습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람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셔서는 ‘나는 너를 지키는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다독거렸습니다. ‘왜 두려워하느냐’고, ‘왜 나를 신뢰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느냐’고 나무라지 않으시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어깨를 감싸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 그대로 아브람을 지켜주시는 방패이십니다. 세상의 불의가 아브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도록, 사단의 교활함이 아브람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지켜주시는 방패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람의 상급이십니다. 아브람에게 지극히 큰 상을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그런 분이라고 믿은 게 아닙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그런 분이라고 상상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말씀입니다. 지극히 사실적인 말씀입니다. 아브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들었습니다. 뜬구름 잡는 말씀으로 듣지 않고 지극히 현실적인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여, 나에게 무엇을 주려 하시나이까?’ 이렇게 묻고는 내친 김에 평소에 마음 깊이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주 여호와여, 아시다시피 저는 자식이 없습니다.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내 집에서 키운 자,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내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라고 푸념 아닌 푸념을 했습니다. 사실 이 푸념의 핵심은 한 가지였습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아브람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였고, 가장 진지한 고민거리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왜 아브람을 선택했는가?’ 하는 문제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아브람과 사래 부부를 선택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모든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에 속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선택하고 부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브람에게 자식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은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기 전에 ‘사래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11:30). 아브람 부부가 불임이라는 사실을 밝힌 다음에 아브람에게 고향 땅을 떠나라고 명하시고, 위대한 축복의 말씀을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른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아브람에게 자식이 없다는 점입니다. 자고로 자식을 낳지 못하는 ‘불임’은 더 이상의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인간의 마지막 절망상태를 상징하는 효과적인 은유입니다. 아브람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미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람이 아무리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높은 권세를 누린다 해도 아브람 대에서 모든 것이 끝나는 절대 정말에 놓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브람에게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열방의 복이 되는 나라를 이루겠다고, 새로운 미래를 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2:2).

 

세상에 역설도 이런 역설이 어디 있습니까. 미래가 완전히 닫힌 사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할 수 있는 어떤 잠재력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열겠다고 하시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불임으로 인해 미래가 완전히 닫힌 사람을 불러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나라, 세계 열방을 품는 복된 나라를 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로운 미래를 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의 믿음 이야기는 바로 이 역설로부터 출발합니다. 이미 태가 닫힌 한 사람, 어떤 미래도 기약할 수 없는 한 사람, 인간 역사의 종말에 이른 한 사람, 미래를 열어갈 어떤 잠재력도 가지지 못한 한 사람, 절대 절망에 놓여 있는 한 사람, 바로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 가시겠다는 역설로부터 출발합니다. 사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만 불임이었던 건 아닙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불임이었고(25:21),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도 불임이었습니다(29:31). 성경은 이처럼 아브람과 이삭과 야곱의 부인들이 불임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임이라는 이 역설 속에는 믿음의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불임의 사람을 선택했다는 이 역설 속에는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축복이 인간의 능력이나 힘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 하나님이 아브람을 통해 이루실 나라는 인간적인 혈과 육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하나님의 자유와 하나님의 권능으로 성취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신비한 지혜로 이루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불임 상태에 있는 아브람과 사래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아직 그 진실을 충분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항변했습니다. ‘여호와여, 나는 아직도 자식이 없습니다. 지금 내 상속자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 뿐입니다. 과연 그를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시는 건가요?’라고 깊은 회의와 불만이 섞인 항변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지체하지 않으시고 답변했습니다. “엘리에셀은 네 상속자가 아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정말 모호한 데라고는 전혀 없는 명확한 답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내친 김에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아브람을 밖으로 이끌어내시더니 하늘의 별들을 보게 하시고는, ‘저 하늘의 별처럼 네 자손도 많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자식이 없는 아브람, 자식을 얻고 싶어도 얻지 못한 불임의 늙은 부부에게 하나님은 하늘의 별처럼 후손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코미디 같은 말씀입니다.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 허무맹랑한 이야기입니다. 믿자니 우스꽝스럽고, 이해하자니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일평생 불임의 세월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얻어 보려는 수많은 시도가 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왜 믿었을까요? 어떻게 믿을 수 있었을까요? 믿자니 우스꽝스럽고, 이해하자니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말씀을 어떻게 믿을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갑자기 자기 허리 부분에서 새로운 생명력이 감도는 것을 감지하기라도 한 것일까요? 사래의 태가 열릴 것이라는 새로운 기대감이라도 생긴 것일까요? 말씀을 듣는 순간 깨달음의 빛이 임하기라도 한 것일까요? 아니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긍정적인 희망이 솟구쳐 오른 것일까요? 아닙니다.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믿은 것은 혈과 육에 속한 어떤 가능성을 보았거나 기대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아브람의 믿음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에 이르렀을까요? 솔직히 이것은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그저 하나님이 믿게 하신 것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예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6:17).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입니다. 믿음은 지식이나 이해나 설득에 근거하고 있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깨달음에 기초하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행하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내가 믿는 게 아니에요. 그냥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짜고짜 믿어진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믿음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합니다. 믿음이 믿음 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인간의 능력이나 힘으로는 실현 가능성이 없어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것, 세상의 모든 것을 총동원한다 해도 결코 실현할 수 없어야 합니다. 만일 0.0001%라도 실현 가능성이 엿보인다면 믿음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실현 가능성은 말 그대로 0%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믿음이 성립됩니다. 아브람의 믿음은 바로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그런 건 아니다. 순종해야 할 말씀이 많다. 그러나 믿음의 토대가 되는 근본 말씀(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말씀)은 인간적인 실현 가능성이 전무하다.

 

그러니까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보고, 만지고, 경험하고, 상황을 관리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을 이해하고 성취해보려 했던 태도를 포기했다는 걸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에 대한 자기 생각과 판단을 완전히 내려놓았다는 걸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할 어떤 가능성도 더 이상 찾지 않는다는 걸 의미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능히 말씀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자기는 알지 못하지만, 어떤 가능성도 보이지 않지만, 자기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불임의 현실을 뛰어넘어 새로운 미래를 열어 가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그런 면에서 믿음은 매우 곤혹스러운 것입니다. 한없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처럼 곤혹스러운 일이 없고, 미련한 일이 없습니다. 노아를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은 다들 맑은 하늘 아래서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고, 밭도 갈고, 장사도 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맑은 하늘 아래에서 거대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방주를 만드는 동안 얼마나 곤혹스러웠겠습니까? 사람들이 다들 혀를 끌끌 차며 한심한 사람이라고, 미친놈이라고 침 뱉을 때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도 자기 몸으로 난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믿고 따를 때에 얼마나 곤혹스러웠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정신 나간 여자라고 입방아를 찧을 때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믿고 따르며 선포한 예수님도 많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당했기 않습니까?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고 따른 제자들도 조롱과 핍박, 멸시와 천대를 받았지 않습니까? 진실로 그렇습니다. 믿음의 길을 간다는 건 한없이 곤혹스러운 일이고, 한없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더욱이 과학과 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한 이 시대에 부활 생명을 믿고, 하나님나라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정말 한없이 곤혹스럽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노아가 맑은 하늘 아래에서 거대한 방주를 만들어야 했던 것만큼이나 곤혹스럽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은 노아의 믿음, 아브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코미디 같은 말씀을 믿은 것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믿음을 보시고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축복을 베풀었습니다. 아브람 안에 하나님의 큰일이 임하였고, 아브람을 통해 하나님의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믿음이 세상 앞에서는 한없이 곤혹스러운 것이고, 한없이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온 세상에 펼치시고 계십니다.

 

출처 : PROTESTANT
글쓴이 : free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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