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역기능 가정의 치유 (창 27:1~10; 41~46) / 이재훈 목사

새벽지기1 2025. 5. 17. 04:40
이삭의 가정은 역기능 가정이었습니다. 역기능 가정이란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실 때 계획하셨던 은혜와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죄로 말미암아 깨어진 가정입니다. 가족구성원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필요를 채우지 못하는 가정을 말합니다. 모든 가정은 정도와 수준의 차이가 있지만, 역기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가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곳이 가정입니다. 영적 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일어나는 곳 또한 가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해야 하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역기능 가정에서 자란 가족구성원들은 사회생활에서도 많은 문제를 나타냅니다. 대인관계에서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는다든지, 거짓말을 쉽게 한다든지 여러 문제가 일어나고, 사회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를 돌이켜보면 가정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삭의 가정은 서로 속이는 일로 가족관계가 깨어지는 역기능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27장에서 7번의 대화가 나오는데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삭이 나이가 많아서 머지않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에서를 불러 축복하고자 합니다. 에서에게 자신이 즐기던 요리를 만들어오게 하는데, 그 말을 엿들은 부인 리브가가 자신이 더 사랑하는 야곱에게 그 일을 시킵니다. 야곱을 에서로 변장시켜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가로채라고 합니다. 야곱은 두려워하며 주저합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질 테니 시키는 대로 하라고 밀어붙입니다. 야곱은 엄마가 시키는 대로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에게 주고자 했던 축복을 가로챕니다. 뒤늦게 에서가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하고 흥분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리브가는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도망치게 합니다. 이것이 한 가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삭의 가정에 나타난 역기능
이삭의 가정에 나타난 첫 번째 문제는 ‘부모의 편애’입니다. 이삭은 에서를 더 사랑했고,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한 게 분명합니다. 이삭은 큰아들 에서만 축복하려고 했습니다. 더 사랑스러운 자녀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어느 한 자녀만 노골적으로 편애해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덜 사랑하는 자녀에게 더 큰 사랑으로 다가감으로써 사랑의 균형을 맞추고, 자녀가 부모에게 소외되었다거나 버림받았다는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어느 한 편에 사랑의 결핍을 가져오는 것이 역기능 가정의 현상입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가족구성원이 내용을 공유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한 사람에게만 좋은 것을 나누는 가정은 점차 정서적인 거리감이 있게 됩니다. 
두 번째 문제는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삭은 축복을 줄 때도 자기 입에 맞는 고기를 요구했습니다.
“이삭이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러니 너는 네 무기인 화살통과 활을 갖고 들로 나가서 나를 위해 사냥을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너라. 내가 먹고 죽기 전에 너를 축복하고 싶구나’”(2~4절). 
애서를 축복하고 싶은 것은 분명한데, ‘내가 좋아하는 음식’, ‘나를 위해’, ‘내가 먹고’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삭은 애서를 축복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어쩌면 에서가 계속 들을 다니면서 사냥에 집중하는 사람이 된 것은 아버지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고기를 가져다주면 좋아하니까 인정을 받기 위해 계속 사냥을 다닌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부모의 조건적인 사랑은 자녀에게 반드시 악영향을 미칩니다. 어릴 때일수록 그렇습니다. 부모의 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모든 것을 거래로 생각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로 가지기가 어렵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기초가 된 사람만이 자존감이 올바르게 되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대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 문제는 ‘영적 분별력 결여’입니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늘 조급합니다. 이삭은 자신이 곧 죽을 사람처럼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2절), “내가 먹고 죽기 전에 너를 축복하고 싶구나”(4절)라며 죽음이라는 단어를 반복하는데, <창세기> 35장을 보면 이삭은 180세까지 살았습니다. 이 사건 이후 40년을 더 살았습니다. 이것이 조급함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은 늘 사소한 것에도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며 삽니다.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가정이 영적 분별력을 올바로 갖지 못할 때 사단이 틈타는 것입니다. 이삭의 영적 분별력이 부족했다는 것이 또 나타납니다. 야곱이 염소 털로 위장하고 자신에게 왔을 때 분별을 못했습니다. 의심은 했습니다. 두 번이나 에서인지 확인하는 질문을 하고 직접 만져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가장의 리더십은 경제적인 공급만이 아닙니다. 영적 분별력이 가장의 책임입니다. 가장이 영적 분별력이 부족하면 정말 중요한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는데, 그게 뭡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무관심하게 됩니다. 
하나님 뜻에 대한 무관심과 불순종
이삭의 가정에서 일어난 역기능의 문제는 일반 가정의 문제와 다른 차원입니다. 그 가정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이 택하신 가정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에 쓰시려고 택한 가정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한 것은 편애를 넘어선 하나님과 관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관심과 불순종입니다.
리브가가 에서와 야곱을 임신했을 때 하나님이 주신 계시가 있습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에서가 반드시 장자권을 이어가야 한다는 고집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사회 문화가 그랬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 나 그리고 우리의 문화, 나의 판단과 감정과 다르다면 그것에 맞추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할 텐데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삭을 쉽게 비판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감정과 문화와 반대되면 쉽게 불순종하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때로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문화를 뛰어넘습니다. 우리의 감정도 뛰어넘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문화, 내가 선호하는 모든 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참된 순종이란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순종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이삭의 가정에는 ‘대화의 단절’이라는 역기능도 나타납니다. <창세기> 21장에 여러 대화가 나오는데 특징이 있습니다. 한 번의 대화에 꼭 두 사람만 나옵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대화하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1~4절 이삭과 애서, 5~17절 리브가와 야곱, 28~29절 이삭과 야곱, 30~40절 이삭과 에서, 41~45절 리브가와 야곱,  그 후에 리브가와 이삭이 대화합니다. 둘씩만 대화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가족구성원의 대화가 단절되어 있습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삭과 리브가의 대화 단절입니다. 부부의 대화 단절은 반드시 자녀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리브가가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한 것을 엿들었습니다. 부부의 대화가 단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리브가가 이삭과 대화하지 않고, 다급한 나머지 야곱을 불러서 남편을 속이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도 잘못입니다. 이러한 행동을 보면 리브가가 평소에 남편을 무시하고 살았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남편이 영적으로 분별력이 없고,  맨날 에서에게 고기를 잡아오라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속이 터졌을 수도 있습니다. 은근히 남편을 무시하고 속여도 된다는 마음이 있었을지도 있습니다. 불안해하는 아들 야곱에게 확신까지 줬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행한 죄 값을 담당해야 했습니다. 부부의 대화가 끊어짐으로 인해서 가족구성원 모두가 깨어졌습니다. 아버지의 축복을 결국 가로챈 야곱은 결국 도망자가 됩니다. 장자의 권리도 누리지 못하고 도망해야 했고, 사랑하는 아들을 떠나보내야 했고, 거짓의 대가를 가족구성원이 담당해야 했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는 아버지가 말로 하는 축복이 그렇게 능력이 있는 것일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말의 힘을 믿었던 시대입니다. 말의 힘을 믿었고, 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축복의 말이 인생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말의 힘을 다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처럼 가정에서 어떤 말을 주고받는지를 세심히 살펴야 하고, 가장 말조심해야 될 영역이 가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축복의 말, 격려의 말, 사랑의 말을 해야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분명 말의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인할 따름입니다. 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말, 가정의 제사장의 말은 곧 하나님의 축복이요, 저주는 곧 하나님의 저주로 여겼던 그 시대의 세계관과 믿음을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의 말과 축복의 말로 자녀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역기능 가정이 회복,
‘예수님의 십자가’
가정에서 일어난 거짓과 속임수는 계속 영향을 미칩니다. 한 가정에 들어온 거짓은 점점 혀의 거짓이 마음의 거짓으로, 조상의 거짓이 자손의 거짓으로 강화됩니다. 결국 역기능 가정이 회복하는 길은 우리 안에 있는 죄와 모든 허물을 십자가에 못 박는 길 밖에 없습니다. 역기능 가정에서 겪는 아픔은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아가게 하는 통로입니다.
초대교회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의 아버지 파트리시우스는 알코올 중독자요, 폭력적인 아버지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아버지를 회상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는 창조주이신 주님을 잊게 하고 주님 대신에 그분의 피조물을 사랑하게 하는 술취함을 좋아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래쪽으로 열등한 것을 지향하는 비뚤어진 의자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포도주에 취해 있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었기에 그가 하나님께 돌아오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가 1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부정적인 기억밖에 없어서 그의 젊은 시절 방황하게 됩니다. 무신론자들의 공통점은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기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수사학자가 되기 위해서 암브로시우스를 만났는데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아버지를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은 아버지가 갓난아이를 품에 안듯이 나를 안아주고 가장 훌륭한 전통을 따라 나를 소중히 여겨주었다.” 
새로운 하나님의 가정에서 아버지 됨을 경험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가정은 깨어진 상처 속에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가정이 역기능 가정에서 경험한 모든 것을 치유할 수 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가정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가정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은 가정의 어떠한 상처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역사입니다. 러셀 무어가 <폭풍 속의 가정>이라는 책의 결론에서 귀한 글을 남겼습니다. 
“가족은 복음이 아니다. 만일 가족이 삶의 궁극적 의미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가족이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당신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길 바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이 겪었던 역기능 가정이나 당신을 버린 배우자 또는 머나먼 반항의 나라로 떠나버린 자녀가 당신의 삶을 망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삶은 우리를 자유케 하여 가족을 이상화하지도 않고 악한 것으로 여기지도 않게 한다. 십자가에서 짐이 축복인 것을 볼 때 우리는 가족을 짐으로 여기거나 싫어하지 않게 된다. 또한 우리의 가족이 우리의 모든 욕구와 갈망을 채워주기를 바라지 않게 된다. 우리 앞에 영광스럽고 영원한 삶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가족은 당신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당신을 이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워할 이유가 아니다. 당신 앞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십자가의 길은 본향으로 이어진다. 빛은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빛나며,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지금 어떤 폭풍과 싸우고 있든 당신은 살아남을 것이다.”
역기능 가정이 우리를 십자가로 이끌 때 주어진 영광과 생명의 빛이 있기에 가정으로부터 모든 것을 기대할 필요도 없고, 채워줄 수도 없는 그 가정에서 오히려 영원한 생명과 복음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가정의 역기능이 십자가로 회복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