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까지 40여 일 지상에 계시면서 십여 차례 나타나셨습니다. 특히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대적자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신 까닭은 그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보지 못해서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과 절망, 낙심과 상실, 당혹과 불안 속에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회복시키고, 그들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과 십자가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특히 막달라 마리아와의 만남을 <요한복음>이 집중해서 조명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들렸다가 예수님께 고침 받아 제자 일원이 되고, 그분을 섬기는 여성 제자였습니다.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님 주변에 있던 여성 제자들 명단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빠지는 경우가 없습니다. 여성 제자 중에서 리더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와의 만남을 부각한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장 먼저, 개인적으로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 제자와 함께하는 만남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개인적인 첫 만남으로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가장 먼저 찾아왔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가장 깊이 사랑한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도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가장 가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물리적인 거리는 예수님과 사랑의 깊이를 의미합니다. 베드로 같은 제자들은 멀찌감치 지켜보았다고 했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끔찍한 십자에서 처형되고 수치 당하시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든 십자가 멀리 있었던 만큼 예수님과 마음의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십자가 가장 가까이에서 절규를 직접 들었던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는 제자임이 분명합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 막달라 마리아가 다른 여인들을 이끌고 예수님 무덤에 찾아온 이유는 시신을 처리하기 위해서입니다. 향품을 바르고 안치하는 일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분명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이 큰 돌로 봉인되어 있고, 군병들이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찾아오면서 ‘누가 우리를 위해 돌을 굴려줄 수 있을까?’를 염려하며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미 돌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돌문을 열어놓은 것입니다. 천사가 돌문을 연 것은 예수님이 무덤 밖으로 나오시도록 도와드린 게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천사가 도와줄 필요가 없는 몸을 입으신 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안을 볼 수 있도록 열어두신 것입니다. 만일 무덤이 돌문으로 닫혀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돌문 안을 볼 수 없고, 무덤 안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면 제자들도 끝까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무덤이 비었다는 것과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이 연결되어 그들이 믿을 수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확신하도록 문을 여신 것입니다. 가장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는 제자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깊은 사랑이 특별한 체험을 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진 자는 반드시 특별한 만남과 체험을 합니다.
특히 막달라 마리아와의 만남을 <요한복음>이 집중해서 조명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들렸다가 예수님께 고침 받아 제자 일원이 되고, 그분을 섬기는 여성 제자였습니다.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님 주변에 있던 여성 제자들 명단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빠지는 경우가 없습니다. 여성 제자 중에서 리더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와의 만남을 부각한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장 먼저, 개인적으로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 제자와 함께하는 만남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개인적인 첫 만남으로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가장 먼저 찾아왔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가장 깊이 사랑한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도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가장 가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물리적인 거리는 예수님과 사랑의 깊이를 의미합니다. 베드로 같은 제자들은 멀찌감치 지켜보았다고 했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끔찍한 십자에서 처형되고 수치 당하시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든 십자가 멀리 있었던 만큼 예수님과 마음의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십자가 가장 가까이에서 절규를 직접 들었던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는 제자임이 분명합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 막달라 마리아가 다른 여인들을 이끌고 예수님 무덤에 찾아온 이유는 시신을 처리하기 위해서입니다. 향품을 바르고 안치하는 일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분명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이 큰 돌로 봉인되어 있고, 군병들이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찾아오면서 ‘누가 우리를 위해 돌을 굴려줄 수 있을까?’를 염려하며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미 돌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돌문을 열어놓은 것입니다. 천사가 돌문을 연 것은 예수님이 무덤 밖으로 나오시도록 도와드린 게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천사가 도와줄 필요가 없는 몸을 입으신 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안을 볼 수 있도록 열어두신 것입니다. 만일 무덤이 돌문으로 닫혀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돌문 안을 볼 수 없고, 무덤 안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면 제자들도 끝까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무덤이 비었다는 것과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이 연결되어 그들이 믿을 수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확신하도록 문을 여신 것입니다. 가장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는 제자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깊은 사랑이 특별한 체험을 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진 자는 반드시 특별한 만남과 체험을 합니다.
사랑의 눈물,
그러나 오해와 불신의 눈물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간절히 주를 찾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반드시 가장 먼저, 특별한 만남으로 응답하십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말했습니다. 그들도 함께 와서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누군가 시신을 훔쳐 갔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자들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10절).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해 함께 왔던 다른 제자들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버린 제자들과 여전히 무덤 밖에 서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이 대조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울다가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11절).
제자들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깊이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게 부활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훔쳐 간 거라고 똑같이 생각했어도 베드로와 요한은 눈물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눈물 흘리는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이 눈물은 사랑의 눈물입니다. 자신을 귀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운 것입니다. 그토록 순결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운 것입니다. 그토록 고귀하신 분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눈물입니다. 그러나 이 눈물도 오해와 불신의 눈물입니다.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을 거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는 오해의 눈물입니다. 예수님이 여러 차례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지 못한 불신에서 나오는 눈물입니다.
그러나 오해와 불신의 눈물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간절히 주를 찾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반드시 가장 먼저, 특별한 만남으로 응답하십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말했습니다. 그들도 함께 와서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누군가 시신을 훔쳐 갔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자들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10절).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해 함께 왔던 다른 제자들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버린 제자들과 여전히 무덤 밖에 서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이 대조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울다가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11절).
제자들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깊이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게 부활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훔쳐 간 거라고 똑같이 생각했어도 베드로와 요한은 눈물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눈물 흘리는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이 눈물은 사랑의 눈물입니다. 자신을 귀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운 것입니다. 그토록 순결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운 것입니다. 그토록 고귀하신 분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눈물입니다. 그러나 이 눈물도 오해와 불신의 눈물입니다.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을 거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는 오해의 눈물입니다. 예수님이 여러 차례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지 못한 불신에서 나오는 눈물입니다.
특별한 사랑 보인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특별한 만남으로 응답
예수님이 특별한 만남으로 응답
무덤 안을 다시 들여다보니 두 천사가 마리아에게 질문했습니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이 질문은 부활의 아침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눈물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사람들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전히 마리아는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다는 생각 때문에 울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눈물은 사랑의 눈물이면서 동시에 오해와 불신의 눈물입니다. 이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예수님이 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도 동일하게 질문하셨습니다. “여자야,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또다시 눈물의 이유를 물었습니다.
“주여 당신이 그분을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 말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그분을 모셔 가겠습니다”(15절).
막달라 마리아가 찾는 예수님은 죽은 예수님입니다. 과거, 추억 속의 예수님입니다. 그녀의 눈은 예수님의 시신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예수님을 찾지 않고, 여전히 죽임 당하신 예수님만 찾고 있었습니다. 빈 무덤이 증거임에도 그녀의 눈은 슬픔의 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적어도 자신이 이해하고 있었던 범위까지는 모두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리라고 하신 말씀까지는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에서 다시 사신 부활의 진리를 믿지 않으면 모든 상황이 반대로 보일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슬픔의 눈물에 머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의 부족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제자의 상태가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예수님을 깊이 사랑한 제자가 이런 상태였다면,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부족함을 책망하지 아니하셨고, 그들을 찾아가셨고, 개인적으로 만나주셨습니다. 죄책감에 빠져있는 베드로를 회복시켜주셨고, 의심에 사로잡혀 있는 도마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들을 다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세워주셨습니다.
부활에 대한 의심과 불신, 오해는 현대인들로부터 시작된 게 아닙니다. 예수님 가장 가까이 있었던, 가장 사랑했던 제자에게도 존재했습니다. 그처럼 부활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당황하고, 오해하고, 믿지 못하는 제자들의 반응을 보면 신약성경이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책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부활이 신화였다면 제자들이 한결같이 믿지 못하는 모습은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시점을 주목해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집으로 돌아간 이후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였을 때 나타나시는 게 좋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이 돌아가고, 남아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기 위해서 때를 정하신 것입니다. 가장 먼저 나타난 사람이 누구인가가 중요합니다. 다른 제자에게는 없는 눈물을 흘리는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수제자 베드로보다 먼저, 육신의 가족보다 먼저 특별한 사랑을 보인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특별한 만남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부활의 아침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눈물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사람들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전히 마리아는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다는 생각 때문에 울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눈물은 사랑의 눈물이면서 동시에 오해와 불신의 눈물입니다. 이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예수님이 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도 동일하게 질문하셨습니다. “여자야,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또다시 눈물의 이유를 물었습니다.
“주여 당신이 그분을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 말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그분을 모셔 가겠습니다”(15절).
막달라 마리아가 찾는 예수님은 죽은 예수님입니다. 과거, 추억 속의 예수님입니다. 그녀의 눈은 예수님의 시신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예수님을 찾지 않고, 여전히 죽임 당하신 예수님만 찾고 있었습니다. 빈 무덤이 증거임에도 그녀의 눈은 슬픔의 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적어도 자신이 이해하고 있었던 범위까지는 모두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리라고 하신 말씀까지는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에서 다시 사신 부활의 진리를 믿지 않으면 모든 상황이 반대로 보일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슬픔의 눈물에 머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의 부족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제자의 상태가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예수님을 깊이 사랑한 제자가 이런 상태였다면,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부족함을 책망하지 아니하셨고, 그들을 찾아가셨고, 개인적으로 만나주셨습니다. 죄책감에 빠져있는 베드로를 회복시켜주셨고, 의심에 사로잡혀 있는 도마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들을 다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세워주셨습니다.
부활에 대한 의심과 불신, 오해는 현대인들로부터 시작된 게 아닙니다. 예수님 가장 가까이 있었던, 가장 사랑했던 제자에게도 존재했습니다. 그처럼 부활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당황하고, 오해하고, 믿지 못하는 제자들의 반응을 보면 신약성경이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책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부활이 신화였다면 제자들이 한결같이 믿지 못하는 모습은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시점을 주목해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집으로 돌아간 이후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였을 때 나타나시는 게 좋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이 돌아가고, 남아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기 위해서 때를 정하신 것입니다. 가장 먼저 나타난 사람이 누구인가가 중요합니다. 다른 제자에게는 없는 눈물을 흘리는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수제자 베드로보다 먼저, 육신의 가족보다 먼저 특별한 사랑을 보인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특별한 만남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오해와 불신의 눈물을
복음 전하는 눈물로
복음 전하는 눈물로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마리아야!’ 하시자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어로 ‘랍오니!’하고 말했습니다(이 말은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16절).
‘랍오니’라는 호칭은 랍비보다 한 단계 더 높이는 존칭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평소 부르던 호칭을 순간적으로 부른 것입니다. 이때 틀림없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갔을 것입니다. 놀라운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께 나왔는데 그분이 “나를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만지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못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갈 것이다’라고 말하여라’”(17절).
“나를 만지지 말라”는 말씀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나에게 매달리지 말라”입니다. “나에게 매달리는 일을 멈추라. 더는 나를 육신에 머무는 자로 생각하지 마라. 나는 아버지께 올라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이 땅에서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부활 이후 일어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비밀들, 다시 오실 예수님, 하나님의 구속계획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이전 상태로 돌아온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도 예수님을 붙잡을 수 없었고, 이 세상도 예수님을 붙잡아둘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제 우리는 새로운 관계로 만나야 한다. 나는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데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감으로 인해서 나타난 새로운 변화를 너희들이 증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단지 “내가 다시 살아났다고 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부활로 인해 생겨난 새로운 관계를 전하라고 당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 아버지, 예수님의 아버지가 곧 우리 아버지시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곧 우리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갈 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분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복음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관계, 새로운 세상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부활은 너희의 부활이기도 하다. 내가 부활해 하나님께로 올라가지만, 그것은 너희의 부활을 위한 일이다. 나는 이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올라가니 너희도 장차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미래, 새로운 변화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당부하신 내용입니다.
‘랍오니’라는 호칭은 랍비보다 한 단계 더 높이는 존칭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평소 부르던 호칭을 순간적으로 부른 것입니다. 이때 틀림없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갔을 것입니다. 놀라운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께 나왔는데 그분이 “나를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만지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못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갈 것이다’라고 말하여라’”(17절).
“나를 만지지 말라”는 말씀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나에게 매달리지 말라”입니다. “나에게 매달리는 일을 멈추라. 더는 나를 육신에 머무는 자로 생각하지 마라. 나는 아버지께 올라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이 땅에서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부활 이후 일어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비밀들, 다시 오실 예수님, 하나님의 구속계획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이전 상태로 돌아온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도 예수님을 붙잡을 수 없었고, 이 세상도 예수님을 붙잡아둘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제 우리는 새로운 관계로 만나야 한다. 나는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데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감으로 인해서 나타난 새로운 변화를 너희들이 증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단지 “내가 다시 살아났다고 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부활로 인해 생겨난 새로운 관계를 전하라고 당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 아버지, 예수님의 아버지가 곧 우리 아버지시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곧 우리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갈 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분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복음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관계, 새로운 세상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부활은 너희의 부활이기도 하다. 내가 부활해 하나님께로 올라가지만, 그것은 너희의 부활을 위한 일이다. 나는 이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올라가니 너희도 장차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미래, 새로운 변화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당부하신 내용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분을 가장 깊이 사랑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셔서 가장 중요한 복음의 내용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해와 불신의 눈물을 흘리는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을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눈물로,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눈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의 증거를 통해 전하기 원하셨던 새로운 관계의 축복을 많은 사람에게 증거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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