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예수 경험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3. 18. 06:55

어제 묵상 마지막 단락에서

삶 경험은 존재 경험이고

그 존재 경험이 하나님 경험이라고 말했다.

이런 표현들이 너무 현학적이어서

우리에게 잘 와 닿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과 별로 상관없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현학적이라는 말은 일단 접어두고

기독교 신앙과의 연관성만 짚자.

 

기독교 신앙은 주로 예수 사건과 연관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런 신앙의 기초와 존재 경험은 거리가 있어 보인다.

예수 경험은 순전히 믿음에 관계된 것이고

존재 경험은 철학적 인식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철학적인 사유와 경험을 골치 아픈 것으로 제쳐두고

오직 믿음을 강화하는 일에 매진한다.

물론 믿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게 아니지만

그것이 존재 경험에 이르는 철학적 사유와 무조건 충돌하는 건 아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하고 믿고 경험한다는 게 무엇일까?

이 질문을 다루는 신학 주제를 기독론이라고 한다.

기독론의 깊이로 들어가기는 힘들다.

‘그리스도’라는 용어만 보자.

그것은 구원자라는 뜻이다.

구원은 ‘어디로부터 건짐을 받았다.’는 뜻이다.

‘어디로부터’는 죄와 죽음을 가리킨다.

죄와 죽음은 생명을 파괴하는 힘이다.

무엇이 생명인가?

이런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으니

이 정도에서 일단 멈추자.

연속적인 질문의 마지막은 생명에 대한 것이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하고 경험한다는 것은

곧 생명에 대한 질문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그가 생명을 이해하는 깊이만큼

신앙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생명을 돈벌이로만 여긴다면,

그래서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즐겁게 사는 것으로만 여긴다면

그에게 예수는 그런 차원에서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런 차원의 문제들과만 얽혀 살기 원하면

굳이 기독교 신자가 될 필요는 없다.

자본주의 비슷한 이념만으로

그의 관심은 해결될 테니 말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명제가 나에게는

존재의 용기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다.

죽음의 힘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이 세상에서도

무상한 삶에 떨어지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서 공생할 용기를

나는 예수에게서 공급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경험은 구원 경험이며,

구원 경험은 곧 존재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