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장난기 가득한 눈'(이성복)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2. 8. 07:47

來如哀反多羅 7

 

불어오게 두어라

이 바람도,

이 바람의 바람기도

 

지금 네 입술에

내 입술이 닿으면

옥잠화가 꽃을 꺼낼까

 

하지만 우리

이렇게만 가자,

잡은 손에서 송사리떼가 잠들 때까지

 

보아라,

우리 손이 저녁을 건너간다

발 헛디딘 노을이 비명을 질러도

 

보아라,

네 손이 내 손을 업고 간다

죽은 거미 입에 문 개미가 집 찾아 간다

 

오늘이 어제라도 좋은 날,

걸으며 꾸는 꿈은

壽衣처럼 찢어진다

 

 

 

 

來如哀反多羅 8

 

내게로 왔던 것은

사랑이 아닐지 모른다

피에로 파올로 파솔리니,

오늘 같이 자주지 못해 미안해요

 

피에로 파올로 파솔리니,

교황은 자주감자 꽃 옷을 찢고

개들은 묵주반지 돌리듯 이를 간다

 

피에로 파올로 파솔리니,

그대의 愛液을 맨머리로 받으면

내 이마에 돗자리 자국이 생겨난다

 

피에로 파올로 파솔리니,

죽음은 내 성기 끝에서 피어날지라도

그대의 음부는 흰 백합을 닮을 것!

 

 

 

 

來如哀反多羅 9

 

검은 장구벌레 입속으로 들어가는

고운 입자처럼

생은 오래 나를 길렀네

 

그리고 겨울이 왔네

 

허옇고 퍼석퍼석한 얼음짱,

막대기로 밀어 넣으면

다른 한쪽은 바둥거리며 떠오르고,

 

좀처럼 身熱은 가라앉지 않았네

 

아무리 힘줘도

닫히지 않는 바지 자크처럼

無聲의 아우성을 닮았구나, 나의 생이여

 

애초에 너는 잘못 끼워진 것이었나?

 

마수다, 마수! 첫 손님 돈 받고

퉤퉤 침을 뱉는 국숫집 아낙처럼,

갑자기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생이여

 

어떻든 봄은 또 올 것이다

 

 

* 금년 봄에 나는 두 권의 시집을 읽었고, 여전히 읽는 중이다. 하나는 황동규의 <사는 기쁨>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복의 <래여애반다라>다. 황동규의 시가 이해하기도 좋고 정서적으로도 내게 맞는다. 내 수준에 딱이다. 이성복의 시는 불편한 구석이 적지 않고, 또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래도 읽었다. 그가 보고 있는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와는 다른 눈이지만 보고 있는 그것은 비슷하다. 불가해한 삶의 현상이 그것이다. 이성복의 시가 침침하고 불안해보여도 결국은 황동규와 비슷한 삶의 기쁨을 말한다. 어둠과 밝음이 겹쳐 있다.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한 시가 다 그렇듯이 말이다. 래여애반다라 9번의 마지막 대목에서 그는 생이 ‘갑자기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자기를 바라본다고 느낀다. 생을 하나님이라고 바꿔 읽으면 하나님이 장난기 어린 눈으로 자기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이 세상을 소풍이라고 노래한 천상병 시인의 그것과도 통한다. 저 시인의 눈에 비친 장난기가 우리 기독교인들의 눈에는 은총으로 경험될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밑으로 내려놓을 때만 경험될 수 있는 신비한 삶의 심층에 저 장난기, 혹은 은총이 자리하는 게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