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1절부터 6절까지는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다. “에브라임”은 북 이스라엘의 다른 이름이고,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다. 이 말씀은 앗시리아에게 멸망할 것에 대한 예언이거나 심판 받은 이스라엘 대한 애가다.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은 교만에 있었다. 이사야는 교만에 빠진 상태를 술취함의 상태에 비유한다(1-4절). 그 모든 심판이 지나고 “그 날이 오면” 주님께서는 남은 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이다(5-6절).
7절부터 13절까지는 남왕국 유다에 대한 예언이다. 유다 백성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술에 취해 있다(7-8절). 그 책임은 “제사장과 예언자”에게 있다. 그들은 독한 술에 취한 사람처럼 “환상을 제대로 못 보며, 판결을 올바로 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사야의 예언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거부한다(9절). 10절의 히브리어 문장은 번역하기에 매우 난해하다. 개역개정 성경은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도서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라고 번역했다. 어떻게 번역하든, 이 말은 유다의 제사장과 예언자들이 이사야의 예언을 조롱하는 말이다. 영적 지도자들이 이렇게 타락하니 백성도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이방 민족의 손에 부치실 것이다(11-12절). 그 때 하나님은 그들이 이사야를 조롱하던 동일한 말로 그들이 조롱 받게 하실 것이다(13절).
14절부터 22절까지에서 이사야는 유다의 실책을 지적한다. 그들은 앗시리아로부터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이집트와 협약을 맺으려 했다. 이사야는 이집트와 연맹하는 것을 “죽음과 언약을 맺고” “스올과 협약을 맺는”(15절) 것이라고 규정한다. 이집트의 도움을 받으면 절대 안전할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지만, 절대 안전은 하나님에게만 있다(16-17절). 하나님을 등지고 이집트와 언약을 맺은 유다는 결국 앗시리아로부터 큰 재앙을 맞게 될 것이다(18-20절).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다(21절). “브리심 산”은 하나님께서 불레셋을 물리친 곳이다(삼하 5:20). 이렇게 전하면서 이사야는 유다 백성에게, 자신의 경고를 비웃지 말라고 덧붙인다(22절).
23절부터 29절까지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농부에 비유한다. 농부는 밭을 갈기도 하지만 씨를 뿌리기도 하고 정성들여 가꾸기도 한다. 또한 추수할 때 농부는 도리깨로 쳐야 할 것과 수레바퀴를 굴려야 할 것을 구분한다. 소회향이나 대회향 같은 작은 씨앗을 추수할 때는 작대기로 가볍게 두드린다. 그것처럼 하나님은 때로 밭을 갈듯 심판도 하시지만 씨를 심고 가꾸는 것처럼 돌보기도 하신다. 도리깨로 치듯 혹은 수레바퀴를 굴리듯 심판할 때도 있지만, 작은 막대기로 살살 털 때도 있다. 하나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에 있기 때문입니다.
묵상:
이스라엘이 유목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목자의 비유는 흔히 보지만 농부의 비유는 보기 드뭅니다. 농부의 비유와 목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성품의 서로 다른 면을 드러내 보여 줍니다.
농부가 씨앗을 가꾸거나 나무를 가꾸는 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보살피는 방법과 닮았습니다. 농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심은 씨앗과 가꾸는 나무가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농부는 때로 아픈 결정을 해야 합니다. 땅을 갈아 엎어야 하고, 싹을 솎아 내기도 해야 합니다. 나무 가지를 잘라 주어야 하고, 열매가 너무 많이 열리면 일부를 따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농부에게도 아픈 일이고 희생 당하는 싹이나 나무 가지 혹은 열매에게도 아픈 일입니다. 하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입니다. 더 실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려면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처럼 하나님도 당신의 백성을 “열매 맺는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 때로 징계도 하고 심판도 하십니다. 잘려 나가는 나무 가지가 농부에게 항변할 수 없는 것처럼, 심판과 징계를 당할 때 하나님께 항변할 수 없습니다. 묵묵히 하나님의 처분을 받을 뿐입니다. 나무를 자르는 농부에게 계획이 있는 것처럼 심판하시는 하나님께도 계획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사야의 고백처럼 “주님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끝없이 넓다”(29절)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청년 시절에 다니던 교회의 목양실에는 “농심목회”(農心牧會)라는 큰 액자가 걸려 있었습니다. 누군가 그 목사님에게 농부의 심정으로 목회하라는 뜻으로 써 준 액자였습니다. 부지런한 농부셨던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정성스레 밭을 일구고 씨앗 하나라도 허비되지 않게 하고 고이고이, 알뜰살뜰 보살피셨습니다. 가물면 물을 대주고, 큰 비가 오면 밤잠을 설치며 작물들을 돌보셨습니다. 때로 애지중지 가꾼 작물에 피해가 생기면 자식을 잃은 것처럼 상심하셨습니다. 하지만 추수 때가 되면 어머니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고, 이것이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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