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1절부터 7절까지에서 이사야는, 이집트에 의존하려는 유다를 책망하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주전 705-701년 사이에 유다는 앗시리아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이집트에 사절단을 보냈다. 주님은 그것이 당신의 뜻이 아니라고 하신다(1절). 그들은 이집트가 자신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그것은 망상일 뿐이다(2-3절). 이집트로 내려간 사신들은 수치와 치욕만 안고 돌아올 것이다(4-6절). 이집트는 “맥 못쓰는 라합”(7절, “라합”은 바다에 사는 신화적 괴물을 뜻한다)이 되었기 때문이다.
8절부터 17절까지에서 이사야는 유다의 죄악을 고발한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유다 백성에게 가서 주님의 뜻을 전하라고 하신다(8절). 그들은 “반역하는 백성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손”(9절)이다. 그들은 선견자와 예언자의 말을 거부하고(10-11절) “억압과 사악한 일을 옳은 일로 여겨서, 그것에 의지하였”(12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심판을 당할 것이다(13-14절). 그들이 구원 받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15절).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는다(16절). 따라서 심판 밖에 답이 없다(17절).
18절부터 26절까지는 심판 후에 올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예언이다. 심판은 하나님의 마지막 행동이 아니다. 이사야는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시려고 기다리시며, 너희를 불쌍히 여기시려고 일어나신다”(18절)고 전한다. 그 날이 오면, 주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고(19절) 스승들을 보내셔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실 것이다(20-21절). 그들은 섬기던 우상들을 스스로 내다 버릴 것이며(22절), 수고하는 대로 풍성한 수확을 거둘 것이다(23절). 그들이 기르는 가축까지도 은택을 입을 것이며(24절) 산천과 초목도 번성할 것이다(25절). 그 날이 오면, 하나님의 빛이 깃들어 모든 상처와 장애가 치유될 것이다(26절).
27절부터 33절은 앗시리아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다. 하나님은 앗시리아를 “진노의 몽둥이”로 사용하셔서 여러 나라들을 심판하셨다. 그것은 앗시리아의 죄악을 묵인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이 선택한 죄악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신 것이다. 때가 이르러 그들의 죄악의 분량이 채워질 때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심판을 시작하실 것이다(27-28절). 그 때가 되면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보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29-33절).
묵상:
히스기야 왕은 앗시리아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사절단을 이집트로 보냅니다. 그것은 거대 제국으로부터의 위협을 또 다른 거대 제국의 힘으로 막아 보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는 차제에 유다를 군사 대국으로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는 수십 년 동안 지속된 왕실의 내분으로 인해 이빨과 발톱이 다 빠진 호랑이 신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집트를 “맥 못쓰는 라합”(7절, 개역개정 “가만히 가라앉은 라합”)이라고 부르십니다. 겉으로는 무서운 괴물처럼 보이지만 아무 힘도 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계획은 “수치와 치욕”(5절)만을 안겨 줄 것입니다.
앗시리아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그들이 할 일은 이집트에 사신을 보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그들 자신의 타락상을 돌아보고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언자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억압과 사악한 일을 옳은 일로 여겨서, 그것에 의지하였”(12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붕괴될 성벽”처럼 되고 “깨어진 항아리”처럼 되어 버렸습니다(13절).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너희는 회개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것이며,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다”(15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살 길은 하나님께 돌이키는 길 뿐인데, 그들은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유다 지도자들의 행동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삶의 위기 앞에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궁여지책으로 위기를 때우려 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고쳐야 합니다. 하지만 위기 앞에서 자기를 고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그 위기를 모면할 궁리만 합니다. 기도의 자리를 찾기 보다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묘수를 찾고 계획을 세우고 수단을 구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조금만” 도와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나님을 절대 주권자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플러스 알파의 도움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11절)을 업신여기는 것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좋은 말씀 > -사귐의 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의로 다스릴 왕 (이사야서 32장) / 김영봉목사 (6) | 2024.11.05 |
---|---|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이사야서 31장) / 김영봉목사 (0) | 2024.11.03 |
마음과 입술과 손발 (이사야서 29장) / 김영봉목사 (1) | 2024.11.01 |
농부이신 하나님 (이사야서 28장) / 김영봉목사 (0) | 2024.10.31 |
심판 중에 기뻐하는 이유 (이사야서 27장) / 김영봉목사 (0) | 2024.1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