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막15:20)
이제 군인들의 조롱이 끝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사형수에게 가하는 모욕 행위를 그저 기계적으로 따른 것뿐입니다.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전혀 받지 않았을 겁니다.
이게 비극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행하는 것을 판단할 줄 모릅니다. 특히 구조적인 악에서는 무기력합니다. 예를 들어서 미국의 노예제도가 그렇습니다. 노예를 부린 농장 주인들은 모두 믿음 좋은 청교도들이었습니다. 개중에는 물론 로마가톨릭교도들도 있었구요. 그들은 노예를 사람 취급하지 않으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사회가 구조적으로 그것을 정당화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그런 구조를 초월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런 악한 구조에 빠져들지 않기를 기도해야겠지요.
군인들은 예수님에게서 왕을 상징하는 자색 옷을 벗기고 원래의 옷을 입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자색 옷을 입혔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조롱의 대상으로만 다루어졌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악한지 모르겠습니다. 죄수에게 더 큰 모욕을 주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찾아낸 겁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내어주었다고 했는데(막 15:15) 실제로 채찍질을 했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갈대로 머리를 치는 걸 채찍질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같은 영화에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몸이 채찍에 맞아 피범벅이 되는 걸로 나오는데, 그것에 대한 사실 관계를 복음서에서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통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핵심도 아닙니다. 모욕과 저주와 버림받음과 죽음이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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