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컬럼3

두려움과의 화해

새벽지기1 2021. 5. 8. 03:51

개인이건 국가건 모두에게 풀기 어려운 난제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 문제와 씨름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접근하십니다. 즉 그 문제 자체보다는 그 문제를 다루는 우리들과 씨름하십니다.

야곱은 천신만고 끝에 성공하여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오매불망 그리던 고향 땅을 눈앞에 두고도, 선뜻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것은 형 에서와의 풀어야 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십 년 전에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권을 빼앗은 일과 눈물로 복수를 다짐하던 형 에서의 무서운 얼굴이 그의 발목을 잡은 것입니다.

머리를 감싸며 고뇌에 빠져 뒹구는 그 날 밤,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났고, 야곱은 그를 알아보고 하나님의 축복을 요구하며 매달렸습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 너무나 결사적이어서 하나님의 사람조차도 어쩌지 못했고, 마침내 야곱의 환도뼈를 부러뜨려 버립니다. 그래도 야곱은 그의 발을 놓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야곱을 어쩌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람이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어서 말합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창 32:28)

야곱이라는 이름은 “빼앗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더불어 겨루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에는 인생의 본질을 결정하는 열쇠가 있습니다.

“환도뼈”라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의 원천과 중심을 상징합니다. 공부하고 일하고 준비하는 모든 것은 곧 환도뼈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환도뼈를 강화하여 남을 이기고 뭔가를 쟁취하려는 것이 모든 삶의 목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빼앗는 자” 야곱은 모든 인간의 이름인 동시에 바로 내 이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그 환도뼈를 부러뜨리시고 새 이름,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는 자”로 바꿔 주셨습니다. 이것은, 세상 문제를 자신의 환도뼈에 의지하여 풀지 말라는 것이며, 하나님과 씨름하여 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하여 푼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가장 두려워하며 동시에 가장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솔로몬이 말했습니다.

얽힌 문제를 풀어보겠다고 문제의 인물과 사건과 씨름하면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나만 잘못했어!”라는 생각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람과 사건과 씨름하다 보면 내 정당성이 상승합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억울함과 증오가 증폭되어 버립니다. 그 배후에서 파괴의 영, 사탄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씨름하다 보면 나타나는 현상은 전혀 다릅니다. 내가 잘 했고 상대방이 잘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이 점점 작아집니다. 정당성도 점점 낮아집니다. 억울함도 사라지고, 증오심도 꼬리를 감추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나오는 소리는 “제가 잘못했어요.”입니다.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야곱이 이렇게 외칩니다. “브니엘!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 되었도다.”(창 32:30) “브니엘”이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할 때만이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한 야곱, 하나님의 얼굴을 본 이스라엘은 어떻게 변하였습니까?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비록 몸은 환도뼈가 부러져 다리를 절었으나, 야곱의 마음은 소망과 자신감으로 당당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 내 자신과의 관계가 바로 정립됩니다. 그래서 너무 무서워 도저히 건널 수 없었던 얍복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눈을 들어보니, 형 에서가 군사 사 백 인이나 거느리고 오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창 33;3) 야곱이 달라졌습니다. 그 앞에 당당히 앞서서 나갔습니다. 그리고 형 에서 앞에 나아가 절을 하되, 일곱 번을 하였습니다. 일곱 번의 절은 완전한 굴복을 말합니다. 이제 처분대로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뵙고 난 다음, 죽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죽이러 온 에서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에서가 달려 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을 맞추고 피차 우니라.”(창 33:4)

그동안 야곱을 괴롭혔던 최대 난제가 아름다운 결말을 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7)

난제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연약하고 어리석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잡을 때 그 어떤 난제도 해결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어떤 일에도 넉넉히 이기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