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고 데이’라는 라틴어는 ‘하나님의 형상’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이미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라.”(창 1:28)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이룰 때 하나님의 복을 받아 번성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스스로의 이미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야합니다. 내 자신을 증명하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스런 형상을 입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곧 그리스도의 형상을 덧입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궁극적인 승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이삭은 “벼 이삭”처럼 유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손해를 봐도 변변히 항의 한번 못하는 못난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은 가나안 땅 한 구석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습니다. 주변은 온통 이방인들뿐이었습니다. 인종차별과 같은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어려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 땅에 가뭄이 들었고 살길을 찾아 조금 더 형편이 나은 인근 블레셋 지역의 그랄이라는 성읍으로 옮겼습니다.
그랄 지방으로 거처를 옮긴 이삭은 장차 이집트로 가려고 했습니다. 이집트는 나일 강 덕분에 가뭄 걱정 없이 언제나 먹을 양식이 풍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 26:3-4)
이삭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땅에 그대로 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허물 많은 이삭을 보호하셨고 축복하셨습니다. 농사를 지었는데 백 배의 소출을 보았습니다. 가축의 수도 많아졌고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방 사람들의 시기로 인하여 어려움은 더욱 커졌습니다. 이삭의 소유 우물을 모두 흙으로 메워버린 것입니다. 물이 귀한 그 지방에서 우물은 가장 큰 재산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취한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묵묵히 그 지방을 떠나서 식솔들을 이끌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우물을 팠고, 또 사람들이 몰려와서 빼앗기면 물러나기를 수차례나 하였습니다.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라 하였더라.”(창 26:22)
하나님의 소원은 나의 속사람의 변화이며 하나님 형상의 회복입니다. 이것이 문제해결의 핵심입니다. 기도가 부족하여 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며, 그래서 내 삶의 방향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나는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고, 실패의 원인인 내 문제는 교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보 이삭은 겉으로는 무능해 보이지만,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가는 중입니다. 그는 바보스러울 만큼 평온합니다. 그의 평온은 그저 하나님의 약속을 바보같이 믿으며 견뎌내는 과정에서 생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미국의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인권운동에 참여할 당시, 위대한 체험을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야 의를 위하여 일어나라 진리를 위하여 일어나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하리라. 절대로 혼자 내버려두지 않겠다.” 주님의 약속을 들은 것입니다. 그 신앙체험은 킹 목사에게 그 험난한 사태와 끝내는 죽음까지도 용감히 맞설 힘을 공급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종차별 철폐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미국 땅에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이 하나님의 약속에는 그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개인적인 능력, 출신성분과 배경, 성분과 학벌, 외모까지도 이 하나님의 약속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다만 그 약속을 붙잡는 사람만이 인생의 모든 역경을 이기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재산을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바보처럼 허허 웃고 있는 이삭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창 26;24) 그런 이삭에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아비멜렉이 찾아온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그랄 지방을 다스리는 통치자로 이삭을 끝없이 괴롭히던 그가 군대장관 비골까지 대동하고 이삭을 찾아온 것입니다. 이삭은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창 26:27) 그런데 그들의 입에서 엄청난 말이 쏟아졌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창 26:28) 더 놀라운 말이 이어집니다.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창 26:29) 이삭이 아비멜렉을 해한 것이 아닙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해를 끼쳐왔습니다. 그런 그들이 제 발로 찾아와 이삭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들이 화친을 청한 이유는 단 한 가 지,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 계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곧 바보 이삭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예수님께서 하신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말씀을 통해 ‘준비된 선’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삭은 겉으로는 무능해 보이지만 ‘준비된 선’입니다.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분명한 목표를 정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께서 “네게 무엇을 줄꼬?”하고 물으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올바른 대답을 하셔야 합니다. 그 대답은 곧 내 자신의 전체를 드러냅니다. 각자 마다 대답은 다를 것입니다. 이어서 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두 번째 질문이 있습니다. “왜 그것을 원하느냐?”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원했고, 그것으로 백성들을 올바로 이끌기 위해서라고 답합니다. 이것이 솔로몬의 태도적 가치입니다. 태도적 가치는 상황의 유불리에 연연해 하지 않습니다. 절대불변입니다. 급변하는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태도입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사도가 당부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1:5-7)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라.”(잠 24:1) 그 이유는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이 등불은 꺼지기”(잠 24:20)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마다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마침내는 그가 하는 일이 모두 형통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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