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브라함은 청지기 엘리에셀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환도뼈 밑에 손을 집어넣게 하고 맹세를 시켰습니다. 이는 고대에 행하던 관습으로 남자들 간에 행하던 가장 친밀하고 가장 굳은 언약식입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창 24:7)
백세 때 얻은 아들 이삭을 위한 배필을 구해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가나안 여인 중에서는 선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인과 이스마엘은 자신들이 원하는 여인들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제 갈 길로 감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의 반열에서 이탈하였습니다. 둘째는 이삭의 배우자를 고향과 친척에게서 택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조치는 단순히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차원이 아닙니다. 셋째는 그러나 이삭을 그곳으로 데리고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모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인생의 최고 목표를 하나님 언약의 실현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삶 전체에 적용할 원칙입니다. 이 원칙을 적용하며 살아갈 때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순수한 신앙이 보존되며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실현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하나님 사람들에게 네가 무엇을 원하든지 너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때 참 하나님 사람들을 하나님께 고귀한 것을 구하였습니다. 삶 전체에서, 성도는 언제나 고귀한 것 하늘의 것을 추구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하늘은 땅을 거느리고 있지만 땅은 하늘을 거느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귀한 것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지만 하찮은 것은 죽었다 깨나도 고귀한 것을 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인 아브라함의 명령을 받은 청지기 엘리에셀은 홀로 먼길을 떠납니다. 목적지는 아브라함의 고향 하란입니다. 그가 길을 떠나며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창 24:12) 자신을 주인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도와주는 것이 곧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청지기의 자세입니다.
성경에는 청지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청지기는 대단히 독특한 존재입니다. 청지기는 종들 가운데 선발합니다. 일단 선발되면 청지기는 주인의 전권을 행사합니다. 아들이 없는 경우 청지기가 상속자가 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청지기인 우리들은 하나님의 권한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이 우리들 것입니다. 엄청난 특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정직한 청지기로 이 일을 행하고 있는가.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웃을 살리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습니다.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길을 떠난 청지기는 아브라함의 고향 한 우물곁에 당도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재미있는 제안을 합니다. 물 길러오는 소녀들에게 물을 청하고 그 소녀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약대에게도 마시우리라.”고 대답하면, 바로 그 소녀를 이삭의 배필로 정하신 것으로 알겠다는 것입니다. 언뜻 들으면 하나님과 흥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유사한 일들이 성도들 사이에서 종종 행해집니다. 어떤 것을 정해 놓고는 이것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뜻으로 알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겠다고 징조를 구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청지기는 그러한 뜻의 제안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조가 아니라 그 소녀의 중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청하는 사람에게 그저 물 한 그릇 쓱 내미는 것이 아니라, 나그네와 그 짐승까지도 배려하는 마음을 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찰력입니다. 하나님의 통찰력을 보지 못하고, 그저 징조만을 구할 때, 기독교는 천박한 미신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과연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이삭의 신부였습니다. 리브가는 청지기의 부탁에 즉각적으로 대답합니다. “주여, 마시소서.” “급히 그 물 항아리를 손에서 내려 마시게 하고, 급히 물 항아리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약대를 위하여 긷는지라.”(창 24:18-20) 리브가의 행동을 설명하면서 “급히”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리브가의 재빠른 몸놀림은 목마른 나그네를 위한 깊은 배려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청지기는 리브가의 그 잽싼 몸놀림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합니다.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이다.”(창 24:27)
아브라함의 명령을 받은 엘리에셀처럼 오직 맡은 사명을 위해 그 먼 길을 갑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아브라함의 생각과 엘리에셀의 생각은 같습니다. “따로” 그리고 “함께”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을 인간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비록 인간은 연약하고 한계적인 존재지만, 하나님의 전권을 맡은 청지기들입니다. 제대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생각을 바로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생각이 같아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해집니다.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아브라함과 엘리에셀,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는 “따로” 그리고 “함께”입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로 사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우리들과 교회는 하나님의 청지기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청지기들이 누리는 하나님의 복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교회는 그이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니라.”(엡 1:23) 생각도 판단도 행동도 예수님과 같이 하여 하나님의 충만을 만끽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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