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컬럼3

모리아 산에 올라

새벽지기1 2021. 5. 1. 06:50

아무리 훌륭한 말과 마차, 철저한 준비와 유능한 마부가 있다고 하더라도 방향이 틀리면 영원히 목적지에는 도착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목적지에서 점점 더 멀어질 뿐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잘못을 흔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수주일과 십일조, 기도와 말씀생활, 교회 봉사에도 몸을 아끼지 않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에도 철저히 순종합니다. 흔히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가장 좋다고 자타가 인정한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의 열심을 인정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믿음이 좋다는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은 늘 충돌하였고 때로는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 회칠한 무덤, 위선자, 소경 등 거침없이 비판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토록 참담한 비판을 받은 이유는, 그들의 철저한 종교생활이 단지 자신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종교적 열성은 본받을 만 한 것이나 그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하시는 방향은 과연 어디일까요?

창세기 22장은 “그 일 후에”라는 말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일”이란 당시 아브라함에게 가장 골치 아픈 존재인 아비멜렉과 평화협정을 맺은 일을 말합니다. 아비멜렉은 이스라엘 족장들에게 가장 강력한 대적자로서 언제나 훼방을 놓는 그랄 지방의 왕이었습니다. 그와 평화협정을 맺어 대외적인 모든 골칫거리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재산도 많이 모았습니다. 물이 귀한 그 지방에서 자신의 명의로 된 우물도 생겼습니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100세 때 대를 이을 이삭도 얻었을 뿐 아니라, 그 동안 가정사의 최대 문제였던 하갈과 이스마엘 문제도 결말을 지었습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전혀 상태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누리고 있는 현재의 행복이 과연 최종적인 것일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원했던 것이 그런 행복이었다면,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나야 합니다. “그 후로 아브라함은 모든 문제를 해결 받고 하나님을 섬기며 브엘세바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일 후에”라는 말은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더 가야할 길은 어디일까요? 하나님께서는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아브라함을 어느 날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방문하신 목적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너무나 기가 막혀 입이 다물어지지 못할 요구입니다. 백세 때 얻은 그 귀한 이삭을 칼로 찌르고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러실까? 이삭을 주실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는 이삭을 제물로, 그것도 태워서 바치라니...” 이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을 것입니다. “왜 하필 이삭을 바치라는 것일까? 소나 양을 바치라면 얼마든지 바칠 수 있는데. 그보다 더한 것도 얼마든지 바칠 수 있는데.” 이런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그 밤을 하얗게 지새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 해가 떠오르자 아브라함은 “그래 어떻든 떠나보자.”라고 생각하며 길을 떠났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한 산은 모리아 땅에 있는 산이며, 그 산에 이르기까지는 3일 밤낮이 걸렸습니다. 이 3일 밤낮 동안 걷는 동안 아브라함의 심정은 복잡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하나님이냐 이삭이냐.” 이것은 아브라함의 최후의 선택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선택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런 시험을 하신 것은 바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선택의 기로에 서기를 원해서 입니다. 아브라함은 삼일 밤낮의 길고 긴 번민과 갈등을 이기고 마침내 결단하였습니다. 이삭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선택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삭을 바칠 것을 결심하고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이삭을 묶고 재단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았습니다. 아마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삭을 내 손으로 죽여야 하다니.” 그런 명령을 하신 하나님이 야속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소중한 분이므로 그분의 명령에 순종키로 한 것입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날카로운 칼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이삭의 가슴을 향하여 찌르려는 순간 하늘로부터 다급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았노라.”(창 22:12)

이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 제가 모리아 산을 오르며 내내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차라리 이삭의 손을 잡고 되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에 저와 제 아들이 다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해야 한다고 결단하였습니다.” 아들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로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보니 수풀에 뿔이 걸려 꼼짝 못하는 양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양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땅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지었습니다. 그 뜻은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라는 뜻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시험을 행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을 영적인 빛으로, 궁극적인 은혜의 자리로, 구원의 완성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원은 히브리어로 ‘아샤’입니다. 그 뜻은 ‘넓히다’입니다.

시험은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을 살리는 굳건한 반석입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하였을 때, 오히려 사랑하는 이삭과 더불어 은혜의 동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모리아 산으로 가는 길은 번민과 갈등의 길입니다. 그러나 모리아 산으로 오르며 하나님을 그 어떤 것 보다 가장 사랑하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 중의 핵심이요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긴 시간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방황하는 이유, 그것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부족하고 때로 넘어지고 쓰러진다 하여도 언젠가는 하나님 나라에 당도합니다. 본토 친척 이비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가라하신 최종적인 장소는 바로 “모리아 산 정상”이었던 것입니다. 모리아 산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만이 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셔서 모든 것이 준비된 모리아 산에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오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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