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컬럼3

웃었느니라

새벽지기1 2021. 4. 28. 06:22

마더 테레사수녀가 함께 일할 사람을 뽑는 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나요?” 잘 웃는 사람을 뽑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의미요법의 창시자 빅터 프랭클 박사가 밝혀 줍니다. 그는 인간이 영혼을 가졌다는 증거는 유머 감각과 자신을 현실과 분리해서 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떻든 피식 웃었던 90세의 사라에게 아기를 주시고 ‘이삭’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삭의 뜻이 바로 ‘웃음’입니다. 하나님은 한 마디로 잃었던 웃음을 찾아주시는 분입니다. 정말 행복해서 웃어본지가 언제 입니까? 웃음을 찾을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십니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루살렘 남쪽 30 킬로미터 떨어진 이 곳은 이스라엘 신앙의 발상지로서 “거룩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성지로 불리는 거룩한 장소가 많이 있습니다. 도망치다 지친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든 곳이 거룩한 장소, 벧엘이 되었습니다. 죄수들이 처형을 받았던 저주의 갈보리 언덕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가장 거룩한 성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곳이 거룩한 장소(성지)로 바뀌는 과정을 깊이 생각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 곳의 공통점은 모두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곳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이유만으로 그 곳이 거룩한 장소가 된 것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 어느 곳이나 다 계십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그 장소가 성지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바로 내게 달려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보통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사람들은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의 태도가 그 곳을 거룩한 장소로 만든 것입니다. 어리석고 나약한 존재들을 택하셔서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주고, 그래서 나같은 사람도 하나님과 동행하게 만드는 것이 성경의 목적입니다. 기독교의 성지는 다른 종교의 성지와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다른 종교의 성지는 그 장소 자체에서 신령한 기운이 나온다고 생각하고 인간들의 범접을 금지합니다.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성지 순례를 떠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널려 있는 성지는 그런 류의 신성한 곳이 아닙니다. 마므레 상수리 나무 숲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거룩한 장소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아브라함의 태도가 그 곳을 성지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거하는 모든 곳을 성지로 만들 수 있습니다. 내가 거하는 그 곳을 거룩한 장소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사건을 하나님 사건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내 주장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방법대로 그 사건을 처리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소망으로, 통곡을 웃음으로 꿔주십니다. 내 고난의 땅이 거룩한 성지로 바뀝니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숲 근처에 거할 때 세 사람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극진히 대접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임을 아브라함이 알아본 것일까요?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에 대해 말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 아브라함은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를 귀한 손님으로 여기고 지극한 환대를 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3) 주께 하듯 한다는 뜻은 내 사사로운 이득이나 보상을 바라는 마음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때 내 삶의 처소가 성지가 되듯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께 하듯 할 때 하나님의 천사들과 나를 도우라 보내신 귀인들을 만납니다. 이것이 절망을 소망으로, 고난을 웃음으로 바꾸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극진한 대접을 받은 나그네들이 본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들이 식사가 끝난 다음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그런데 이 말씀을 사라가 장막 안에서 듣고 말았습니다. 사라가 보인 반응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모든 것을 훤히 드려다 보고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무리 장막 뒤에서 웃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뇨?” 그러시면서 하나님께서 스스로에 대하여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다시 확인을 하셨습니다. 들켜버린 사라가 더럭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딱 잡아떼며 말합니다.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네가 웃었느니라.” 하나님의 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아브라함을 향한 계획은, 인간이 잃어버린 믿음의 유전자를 아브라함 안에서 만드는 것이며, 그 유전자를 확산시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곧 아들을 나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사라는 웃었습니다. 사라의 웃음은 곧 의심입니다. “네가 웃었느니라.” 그 말을 남기고 하나님의 사자들은 떠나 소돔과 고모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 이후, 소돔과 고모라 무서운 유황불 심판이 있었고,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들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달라졌습니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 아니라, 그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믿음으로 이 사건들을 치렀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였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그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이삭”의 뜻은 “웃음”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 아들을 볼 때마다 웃었습니다. 첫째는 너무나 기뻐서. 둘째는 그 때 일을 생각나서 웃었습니다.

다윗이 이런 노래를 하였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렸도다.”(시 97:11-12) 빛과 기쁨은 자신이 이룩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그 빛과 기쁨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감사합니다. 그는 정직한 사람입니다. 진정 하나님만을 경외할 때, 세상의 폭력과 위협이 아무리 강하고 무서워도, 얼마든지 웃으며 이길 수 있는 힘이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노래합니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여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시고,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여 하심이라.”(사 61:3) 웃음을 되찾아주시는 하나님과 동행하시고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과 씨름하십시오. 모든 저주에서 자유로워지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성지로 바뀌며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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