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동식목사

교회를 염려한다는 것

새벽지기1 2020. 12. 10. 04:44

교회를 염려한다는 것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많은 것을 남겼습니다. 그 가운데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이 교회를 위하여 당한 고난을 자랑하였습니다. 고난을 자랑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성공을 자랑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하여 당한 고난을 자랑하였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웃음거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계시로 남겨 주셨습니다. 오고 오는 모든 교회들의 자랑이 무엇이어야 함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성공을 자랑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물이고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니 자랑의 대상으로는 너무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자랑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복음과 함께 고난받는 일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자랑을 십자가에 두었습니다.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성공한 사람들의 십자가 이야기만 있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자랑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누렸던 세상의 기준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세상의 변화를 위하여 우리는 부름 받았습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여 일하여야 합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을 닮은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영향력 있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으려면 십자가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고난받고, 예수님 때문에 사랑하고, 예수님만 드러냅니다. 세상에서 영향력이 커질수록 십자가의 자랑이 커져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보이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경건의 능력이고, 말세에 돈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세상과 전투하는 힘입니다.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살든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 앞에 동등하게 서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행하였던 모든 일에 대하여 차례대로 회계할 것입니다. 그때 실체가 드러나고 슬피 우는 일과 기뻐 찬양하는 모습이 갈라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날이 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만큼 멀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인생은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고 합니다. 그날이 들의 풀과 같고 영화가 들의 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소풍 나온 사람입니다. 본래의 고향을 향하여 걸어가는 순례자입니다. 그날까지 우리는 잠시 이곳에 머무는 것입니다. 살고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고자 있습니다. 시간이 되면 자녀와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떠나야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에게는 미련이 없습니다. 고생이 아니라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에게는 공통된 염려가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한 염려입니다. 이 땅에 보냄 받은 이유가 교회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이 바로 교회 세움에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우리는 이 땅에 존재합니다.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인 이유는 바로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구원하시고, 은사와 재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교회를 세우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한 가지의 염려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교회가 삶의 이유이고, 가족과 노동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를 허물고자 합니다. 교회에 흠을 내고 무너트리려고 합니다. 교회가 힘을 잃으면 그리스도인 역시 무기력해집니다. 그러면 세상은 자신의 길을 갑니다. 철저하게 우상숭배의 길을 갑니다. 그 길은 인간중심입니다. 철저하게 강자의 중심의 인간사회를 만듭니다. 인간이 기준이 되고, 산자의 욕망이 표준입니다. 그러한 사회는 역사에서 경험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네로 황제의 로마와 히틀러의 나치와 르완다의 후투족입니다. 이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우생학적 탐욕만 존재하였습니다.

 

교회가 무너지면 세상은 참담해집니다. 하지만 눈먼 자들의 세상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지역 사람들이 교회를 고발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치 5호 담당제처럼 끔찍한 현실이 다가왔습니다. 교회의 잘못 없음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의 의식이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전에는 교회를 인정하였습니다. 적어도 나쁜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부모들도 아이들이 교회 가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가 나쁜 일을 한다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교회라고 죄가 없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죄의 저급성과 파급성이 세상과 비교할 때 차이가 없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예전에 누렸던 교회의 꽃길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험악한 자갈 길만이 앞에 놓여 있습니다. 앞으로 교회의 고난은 더욱 가속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향한 염려가 있습니다. 삶의 기준이 무너진 인간은 더욱더 과격화될 것입니다. 교회가 살아서 인간의 존엄성을 외치고 흔들리는 삶을 붙잡아야 합니다. 앞으로 30-40년 뒤에 다가올 현실이 어떨지 두렵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바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늦더라도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성경과 선진들의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지금 사람들이 채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식을 추천합니다. 자연적 운동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본래의 삶의 방식을 찾고자 하는 자연적 열망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빨리 따라가는 것보다 천천히 가는 것이 좋습니다. 빨리 가는 사람들이 제대로 가고 있는가 고민할 때 교회가 답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오스 기니스는 이러한 삶은 ‘선지자적 반 시대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이 딱 그 시점입니다. 교회는 빠름이 아니라 바름으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를 자랑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일에 삶의 전부를 바쳐야 합니다. 곧 그날이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