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리민수목사

전도해야 하는 이유 (딤후4:1-2)

새벽지기1 2019. 5. 16. 05:03


전도해야 하는 이유

(딤후4:1-2)

 

서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중간고사 치르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특히 가지원들은 대학에 와서 첫 중간고사였네요.

모두 승리하고 이 자리에 온 줄 믿습니다.

제가 우리 지체들에게 늘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학업과 신앙에 모두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공부를 잘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실한 주님의 제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악을 이기려면 악보다 성실해야 한다!”

세상을 이기려면 세상보다 성실해야 합니다.

 

이제 신록의 계절 5월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캠퍼스에는 수없이 많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영적으로 죽어있는 영혼!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영적으로 잠자는 영혼!

과거에 교회는 다녔지만 지금은 떠나있는 잃어버린 영혼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많이 영적으로 공허한 상태입니다.

어쩌면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을 그리워하는 외로운 영혼입니다.

그래서 저는 5월달을 전도 집중의 달로 선포하고자 합니다.

 

본론

 

오늘은 5월 전도 집중의 달에 앞서 우리가 왜 전도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전도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허물가운데에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3:17)”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셨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아멘!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전도해야 할까요?

둘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다같이 마가복음 138절을 찾아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신 목적은 전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십자가의 구속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하지만 그 사역은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마지막 사역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주로 말씀을 가르치심(teaching)는 것과

설교를 통한 전도(preaching) 사역과

영육간에 병든 자를 고치시는 치유(healing) 사역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가 따라야 할 사역이기도 합니다.

전도!

이것은 우리 주님의 지상 목표였습니다.

또한 이것은 오늘 제자인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할 미션입니다.

 

우리는 왜 전도해야 할까요?

셋째. 전도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스탠딩오더'(standing order)란 말이 있습니다.

명령권자가 명령을 취소하지 않는 한 계속 유지되는 명령을 뜻합니다.

김정은은 북한을 집권한 직후부터 이복형인 김정남의 암살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명령이 재작년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동안 김정은의 명령은 계속 유효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명령을 '스탠딩오더'(standing order)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 '스탠딩오더'(standing order)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명령권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명령을 수령한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입니다.

그 명령은 복음전파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6:15)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18-20)

 

우리는 이 명령이 회수되기 전까지 그 명령을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전도는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스탠딩오더'(standing order)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전도해야 할까요?

넷째, 우리 모두가 생명의 빚진 자 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가슴 아픈 죽음이 참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세월호 학생과 교사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세월호에는 수 많은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던 시각

안산 명성교회 관리집사 양봉진집사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지인의 전화가 걸려 왔다.

지인이 시키는 대로 TV를 켜보니 배가 가라앉고 있었다.

단원고 2학년인 딸 양온유(17)가 탄 배였다.

온유는 오전 7시쯤 엄마에게 '배에서 자고 일어났다'는 문자를 보내온 터다.

양씨는 곧바로 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이후 1시간 동안 몇 번인지 셀 수 없을 만큼 전화기 버튼을 눌러댔고

끝내 연결되지 않아 1056분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온유야, 아빠다. 너를 위해 모두 기도하고 있다. 이럴 때 침착해야 하는 거야.

친구들에게도 동요하지 말고 차분히 기다리면 구조될 거라고 용기를 주렴.'

이 문자에도 답이 없던 온유가 그때 뭘 하고 있었는지 양씨는 닷새 뒤에야 알게 됐다.

딸의 친구들이 찾아와 당시 온유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온유는 갑판까지 나왔다가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갔어요. 방에 남아 있는 친구들 구한다고.'

교회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양씨는

'걔는 그럴 줄 알았어. 친구들이 배 안에 있는데 그냥 나올 애가 아니어서'>

초원학생은 2학년 2반 반장이었다고 합니다.

2학년 3반 담임 김초원선생님도 온유학생과 같은 이유로 불행을 당했습니다.

그 선생님은 가장 탈출하기 쉬웠던 5층 객실에 머물렀지만,

배가 기울자 곧장 4층으로 내려가 제자들의 구명조끼를 일일이 챙기고

겁먹지 않고 무사히 탈출할 수 있도록 다독이느라 정작 자신은 빠져 나오지 못했습니다.

마침 그 날이 김초원 선생님 생일이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26번 째 생일 날 운명을 달리한 것입니다.

누군가 온유양와 김초원선생님의 희생으로 생명을 건진 학생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그들은 모두가 온유양과 김초원선생님께 생명을 빚진 자들입니다.

 

지금부터 130년 전 조선의 백성을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명을 건 전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복음을 전하다 순교를 당한 사람도 있고

루비 켄드릭자매처럼 복음전도도 시작하기 전 풍토병에 죽은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중에 누군가에 의해 복음을 이어받은 생명줄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깨닫고 복음을 위해 생명을 걸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

그가 생명을 건 이유는 바로 빚진 자 의식 때문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수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14-15)

우리가 전도해야 할 이유는 바로 우리도 누군가에게 생명을 빚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군가가 바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전도해야 할까요?

다섯째, 하나님께서 경고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에스겔317-19절을 읽겠습니다.

17.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18.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19.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본문은 오늘 날 기독교 관으로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하지만 본문을 통해 당시 하나님께서 얼마나 절박한 심정이셨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내용은 남유다의 멸망이 임박했을 무렵의 일입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유다 백성들에게 회개할 것을 눈물로 호소하던 때이기도 합니다.

오늘 날 하나님이 우리 민족과 캠퍼스를 보시면 아마도 동일한 심정이셨을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17절 말씀은 우리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인자야를 자기 이름으로 넣고 다시 읽겠습니다.

민수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영적 파수꾼으로 세우셨습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날 모든 크리스찬들은 이 시대의 영적 파수꾼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캠퍼스에 세워진 영적 파수꾼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고 때문에 나가지 말고 사랑으로 나갑시다.

 

그러면 우리는 왜 전도해야 할까요?

여섯째,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첨단의 시대에 전도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날 많은 교회에서 소위 시대에 맞는 전도를 하고자 많은 노력을 합니다.

따지고 보면 얼마가 귀하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첨단 시대에도 제조업은 있다는 사실입니다.

첨단 시대라고 해서 식사할 때 수저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첨단 시대라고 해서 학생에게 연필과 노트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첨단 시대에 사는 우리도 우리 손을 직접 해야 하는 것이 한 두가지 가 아닙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전도가 바로 그렇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전도는 참 미련한 일로 보였습니다.

그러니 오늘 날 세상 사람들의 눈에 전도는 참 미련한 일로 보일 것입니다.

제가 고린도전서12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것을 원시적 부르심이라고 말합니다.

전도는 이 첨단의 시대에 가장 미련한 짓(?)이지만 이는 가장 고상하고 거룩한 사역입니다.

모든 지체들이 감사한 마음으로 용기 있게 순종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다음 주 전도 훈련교실에 앞서 <전도 자세>에 대하여 세 가지 당부를 하고자 합니다.

 

첫째, 구원의 확신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반드시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구원의 확신이나 구원받은 자로서의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그저 노동일 뿐입니다.

내게 절실한 것이 아닌 것을 어떻게 전하겠습니까?

구원의 확신과 기쁨으로 나가십시오.

 

둘째, 영혼사랑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마음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고 사도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이 마음은 지금부터 130년 전 조선을 찾아왔던 선교사들의 마음입니다.

언더우드의 마음이었고 아펜젤라, 존헤론, 루비 켄드릭의 마음이었습니다.

전도! 그것은 예수의 심장을 갖지 않고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영혼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도 바울의 정신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

 

끝으로,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가 부담된다고 합니다.

<전도를 해야 할 필요성도 알고 중요성도 안다.

마땅히 전도해 한다는 사명감도 있다. 그런데 왠지 부담이 된다.>고 말합니다.

특히 요즘처럼 대인기피증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시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 전도자의 부담 가운데 하나는 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전해도 믿지 않을까 하는 염려입니다.

하지만 이런 두려움이나 염려까지도 주께 맡겨버려야 합니다.

염려는 불신앙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부담감을 기쁘게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딤후1:7)”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전도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至上 大命:The Great Commission)입니다.

하지만 명령으로 가지 말고 사랑으로 나갑시다.

성공적인 전도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 전하고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