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 루터는 개인적인 구원 문제로 깊이 고민하며 구원을 향해 몸부림쳤다.
법률가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도원 규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온갖 금욕과 금식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말 최선을 다하여 진지하게 구원의 몸부림을 했다.
하지만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의문과 불안이 사라지지 않았다.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내면의 소리 또한 일치하지 않았다.
그렇게 신앙적 신학적 고민을 거듭하던 루터는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라는 말씀을 발견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롬1:17)는 말씀에 눈길이 붙잡혔다.
특히 ‘하나님의 의’라는 말씀에 충격을 받았다.
루터는 지금까지 ‘자신의 의’에 매달렸는데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복음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구원이라는 게 쟁취해야 할 무엇이 아니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것,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새롭게 깨달은 것이다.
루터에게 그 순간은 지금까지의 세계관이 뒤집어지는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의 순간이었다.
그 후부터 루터는 ‘오직 은혜’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맞다. 구원은 전적인 은혜의 선물이다.
믿음으로 받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은혜의 선물이다.
그런데 500년이 지난 지금 ‘오직 은혜’의 진리가 빛을 잃어가고 있다.
아니, 빛은 희미해진 반면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
‘오직 은혜’의 진리로 인해 행위가 설 자리를 잃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은혜’의 진리를 말하며
‘행위는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외치고 있다.
당연히 행위 주체자로서의 인간의 책임성 또한 증발해버렸다.
인간의 책임을 말하면 ‘오직 은혜’의 진리를 부정한다며 공격한다.
그러다보니 교회 안에는 유아들이 가득하다.
자기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성인은 드물고
하나님께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유아들이 가득하다
또 은혜라는 미명 아래 교회들이 크고 작은 죄악을 용납하고 있다.
루터에게 은혜는 거짓된 구원론으로부터의 해방이었고,
교회와 사회의 전통과 규범으로부터의 해방이었고,
생명의 길을 가게 하는 자유의 능력이었는데,
오늘의 교회에서는 은혜가 죄악을 눈감아주는 방편으로 작동하고 있다.
죄는 은혜로 해결됐으니 더 이상 죄를 거론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교회는 죄인을 받아주어야 하며, 어떤 죄악이라도 덮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진실을 말하면 은혜는 본시 율법의 성취이다.
그런데 율법의 성취인 은혜가 율법을 무력화하고 해체시켰다.
또 은혜는 본시 악한 행위를 종식시키고 선한 행위를 유인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런데 선한 행위를 유인하는 은혜가 행위 자체를 부정하고 추방시켜버렸다.
실로 은혜를 배반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하여, 우리는 이런 은혜를 ‘값싼 은혜’라 한다.
한국교회 안에는 이런 ‘값싼 은혜’가 넘치고도 넘친다.
그러다보니 교회 안에 죄악이 난무하고 있다.
넓게 열린 은혜의 문으로 온갖 죄악이 들어와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오직 은혜’라는 위대한 진리로 인해
교회의 정체성,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다 잃어버렸다.
은혜로 인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으나
은혜로 인해 빛과 소금의 성질을 다 잃어버렸다.
은혜를 배반한 은혜가 ‘오직 은혜’라는 루터의 기치 아래에서 기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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