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구원 문제로 깊이 고민하며 애쓰던 루터는 로마서를 통해
구원은 쟁취해야 할 무엇이 아니고 받아들여야 할 은혜의 선물임을 발견한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믿음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독특함이다.
기독교는 구원의 주체, 구원의 내용, 구원의 방식에 있어서 여타 종교와 다르다.
구원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구원의 내용은 영혼이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이다.
즉 깨어진 창조세계의 원상을 회복하고 완성하는 것,
창조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나라로 전환되는 것이다.
구원의 방식 또한 사람의 혈통이나 종교적 율례나 내적인 정결함에 있지 않다.
거룩한 지혜나 법에 있지 않다. 오직 믿음에 있다.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다.
하여, 루터는 ‘오직 믿음’이라는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런데 500년이 지난 지금 ‘오직 믿음’이라는 기치는 빛을 잃어가고 있다.
아니, 그 기치로 인해 어둠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있다.
첫째, ‘오직 믿음’이라는 기치가 구원의 방편으로 오작동하고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언약과 구원 행위에 대한 신뢰요,
그 신뢰에 기초한 행위 즉 성 삼위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구원을 받아들임이다.
구원이라는 것이 애당초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방식 외에는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길이 없다. 그래서 믿음이다.
그런데 믿음을 구원의 방편인양, 구원의 조건인양, 구원의 마법인양 착각한다.
믿음이라는 방편으로 천국행 티켓을 확보하는 것인양 착각한다.
이것은 애당초 믿음이 아니다.
구원의 조건, 구원의 수단, 구원의 마법으로 작동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타락한 인간의 욕망일 뿐.
바로 이 욕망이 지금 교회 안에서 활개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서의 믿음,
하나님의 구원을 향유하는 것으로서의 믿음은 숨을 죽이고 있고
구원의 방편으로 작동하는 믿음,
구원의 마법을 부리는 믿음이 활개치고 있다.
‘오직 믿음’이라는 기치 아래.
둘째, ‘오직 믿음’이 ‘긍정의 힘’으로 오작동하고 있다.
믿음은 본래 관계에서 요청되는 인격적 신뢰다.
그런데 인격적 신뢰인 믿음을 찾아볼 수가 없다.
매사를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믿음,
내적인 확신을 강화하는 믿음만이 차고 넘친다.
수많은 목사들이 교회 강단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어보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신다는 믿음,
하나님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
기도한 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소리 높이 외친다.
성경은 믿음을 말함으로써 우리의 의지와 자기 확신을 무너뜨리는데
오늘의 교회는 믿음을 통해 우리의 의지와 자기 확신을 강화하고 있다.
‘오직 믿음’이라는 기치를 내세우며 실로 엄청난 왜곡을 일으키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정반대되는 믿음을 설파하고 있다.
셋째, ‘오직 믿음’이라는 기치가 이성의 무력화와 무지를 가져왔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은 본래 광대하고 심오해서 모든 세계를 포괄한다.
인간의 이성과 감성과 의지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구원의 영역이다.
특히 이성의 깨어남 - 세계 안에 유폐된 이성, 어둠 속에 잠자던 이성의 깨어남 - 은
구원의 중심이요 실재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정반대의 길을 간다.
믿음으로 잠자는 이성을 깨우기는커녕 억압한다.
‘오직 믿음’이라는 기치를 내세우며 의문을 갖지 못하게 억압한다.
의문을 갖고 묻는 것을 사단의 짓이라 폄하하며 금기시한다.
사실은 의문을 갖고 묻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깨어난 이성,
진정으로 구원 받은 이성의 참 모습인데
교회는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믿으라고 말한다.
그러다보니 묘한 일이 벌어진다.
똑똑하던 사람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이상하게 바보가 된다.
생각하지 않는 바보, 묻지 않는 바보, 이성을 정지시킨 바보,
믿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바보,
믿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되는 바보가 된다.
바보가 되어야만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는 교회 문화가 그렇게 만든다.
교회는 믿음으로 무지를 조장했다.
그리고 조장된 무지를 통해 그리스도인을 억압했다.
물론 이성으로 믿음을 억압하는 폐해도 적지 않다.
세상의 상식과 이성의 잣대로 신앙의 세계를 판단하는 오류,
세상의 상식과 정의의 잣대로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겠다고 나서는 오만으로 인해
파생되는 폐해로 몸살을 앓는 교회가 적지 않다.
그러나 무지로 인한 폐해는 그보다 훨씬 넓고 깊다.
정리하자.
믿음은 자기 확신이 아니다.
믿음은 신념이 아니다.
믿음은 마술이 아니다.
믿음은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믿음은 적극적 사고방식이 아니다.
믿음은 긍정의 힘이 아니다.
믿음은 능동이 아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아니다.
믿음은 희망이 아니다.
믿음은 무지로의 도피가 아니다.
믿음은 축복의 통로가 아니다.
믿음은 구원의 방편이 아니다.
믿음은 천국행 티켓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투기가 아니다.
믿음은 능력이 아니다.
믿음은 축적할 수 있는 자산이 아니다.
믿음은 불굴의 의지가 아니다.
믿음은 생산하거나 쟁취하는 게 아니다.
믿음은 거래가 아니다.
믿음은 덕이 아니다.
믿음은 종교적 윤리가 아니다.
믿음은 지식이 아니다.
믿음은 지혜가 아니다.
믿음은 진리가 아니다.
믿음은 말씀의 사건이다.
믿음은 말씀이 내 안에서 육화되는 제2의 성육신 사건이다.
그리고 말씀의 사건으로서의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선물이요 은혜다.
말씀의 사건으로서의 믿음은 창조자를 향한 신뢰다.
말씀의 사건으로서의 믿음은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과 베풂을 거저 받는 것이다.
말씀의 사건으로서의 믿음은 계시의 칼로 무지의 장막을 찢는 것이다.
말씀의 사건으로서의 믿음은 보이지 않는 피조세계의 진실을 보는 것이다.
말씀의 사건으로서의 믿음은 궁극의 앎이다.
말씀의 사건으로서의 믿음은 홀로 있지 않다는 깊은 인식이다.
말씀의 사건으로서의 믿음은 자아의 벽을 넘어서는 것이다.
말씀의 사건으로서의 믿음은 하늘과 땅이 하나인 세계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이여!!
‘오직 믿음’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오직 믿음’의 빛으로 속히 나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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