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기도하신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비유로 설교도 하시며 십자가도 지시고 삼 일만에 부활하신 일들이 모두 위대하고 탁월하지만, 그래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기도하신 모습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기도하신 모습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하신 40일 동안 금식 기도입니다. 금식 기도를 마치신 후에 마귀와 싸워 이기신 모습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새벽녘에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신 예수님, 밤이 새도록 기도하신 예수님, 밤 세시까지 산중턱에서 기도하시다가 광풍을 만난 제자들을 바라보고 계시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이 있습니다. 2만 군중(장정 남자만 5,000명)이 따라다니며 말씀을 들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이 아무 것도 먹지 못했음을 아시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후 떼어 먹이신 후 부스러기를 열두 광주리에 거둬들인 모습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신 후에 기도 외에 이런 일이 나올 수 없다고 말씀해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중에서 무엇보다 절정을 이룬 것은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입니다.히브리서에서 예수님께서 통곡하시며 기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고, 사복음서에선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 17장은 ‘예수님의 위대한 중보 기도’
오늘 요한복음 17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중보 기도를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선 중보 기도란 기도의 대상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절에서 8절까지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중보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또 9절에서 19절까지 말씀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그리고 20절에서 26절까지 말씀은 앞으로 제자들이 전도하면 하나님을 믿게 될 많은 사람들, 곧 믿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17장에서 예수님께서 세 가지 영역으로 기도하십니다. 하나는 자신을 위해 기도하시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나머지 하나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우리는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전에 먼저 자신을 위해 기도하신 것을 나누게 됩니다. 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온누리교회에서 중보 기도의 바람이 불고, 새벽 기도, 철야 기도의 바람이 불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중보 기도에 대해 오해하고 있습니다. 흔히 중보 기도라 하면,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오해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계면쩍은 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금기로 간주합니다. 보편적으로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미성숙한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중보 기도는 이웃을 위한 성도의 덕목이지 자신을 위해 중보 기도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면 기복 신앙이라고 매도해 버리기도 합니다. 가족을 위해, 이웃을 위해, 선교사들을 위해, 나라와 세계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더욱 성숙되고 선한 일로 취급합니다.
자신을 위한 중보 기도를 먼저 하신 예수님
그러나 예수님께선 달랐습니다. 가장 먼저 자신을 위해 중보 기도하신 것입니다. 흔히 다른 사람을 위해 먼저 기도하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일 텐데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우선으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방법에 따라 우리도 자신을 위해 먼저 기도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어떤 중보 기도를 하셨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1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영화롭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으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이웃을 도와주고 싶은데 돈이 없다면 도와줄 수 없습니다. 돈이 있어야 남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건강해야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은혜 충만해야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습니다. 먼저 자신이 돈, 건강, 은혜가 있어야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 수 있는 겁니다. 가진 것이 없다면 남을 도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남을 도와 줄 수 있도록 돈도 있고 건강 하며 은혜도 충만하길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선 모든 면에서 남을 도울 수 있도록 항상 풍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자신을 위한 중보 기도에 세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의 안락과 이익,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화를 구한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세상에 오신 목적을 잘 깨닫고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 내용입니다. 셋째는 중보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적절한 때와 시기를 아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그 때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시는 시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사는 동안 결정적인 때가 있습니다. 준비할 때가 있고 일할 때가 있으며 죽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기적도 베푸시고 제자들도 훈련시켰으며 이제 마지막 때가 되었다고 기도하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가 되었는데, 그 십자가를 피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우리는 항상 적절한 그 때를 잘 알지 못하지만, 예수님께선 그 때를 완전히 파악하시고 계셨습니다. ‘아버지여,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점점 가까워 오고 있는데, 아들을 영화롭게 하셔서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소서’라며 적절한 때에 중보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일은 십자가를 지게 해달라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으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됩니다. ‘아버지, 아들이 가던 길을 계속 가게 해 주시고,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가던 길을 포기하지 않게 해 주시며, 상처 받고 모함을 당해도 십자가의 도를 완성하게 해 주십시오. 어떤 유혹이 와도 물리치고 어떤 시험이 닥쳐도 이기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제가 5, 6년 전에 미국 시카고에 있는 윌로크릭교회에서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설교의 제목이 “Keep going”이었는데, “계속 그 길을 가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주일학교 교사 일을 그만 둬야지, 찬양대를 그만 둬야지 혹은 자원 봉사를 그만 둬야지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바로 포기하지 말고 계속 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설교였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설교를 끝내신 후에 교사를 그만 두려고 마음 먹었던 사람, 교회를 떠나려고 작정했던 사람, 마지막 봉사를 다짐했던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하던 일을 그만 두려고 생각했겠느냐며 위로해 주고 이 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하던 일을 계속 하기를 말씀하시는 때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하는 사역으로 인해 한 번쯤 마음이 흔들렸고 시험에 들었으며 이런 일을 하지 말고 편하게 예수님을 믿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선 가던 길을 계속 걷게 하시고 하던 일을 계속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힘들어 포기하고 싶어도 옳은 길이라면 계속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해가 바뀌면서 교회에서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싶었던 게 있습니까? 그 일을 계속 하십시오. 새해에 중도 하차하려고 보따리를 싼 것이 있습니까? 다시 풀어 놓고 가던 그 길을 계속 가십시오. 5절 말씀으로 넘어가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중보 기도는 잘못하면 이기적인 기도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사명을 확인하시는 기도입니다.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그 영화를 잊지 않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깨우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란 곧 하늘에 있는 권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권세를 다시 갖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이에 관한 내용이 2절 말씀에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의 핵심은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권세를 예수님께 주신 목적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2절 말씀을 두 단어로 요약한다면 바로 ‘구원’과 ‘권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의 권세를 예수님께 주셨는데, 그 권세로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는 음부의 권세도 이기지 못하는 천지 만물을 다스리는 영적 권세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설교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권세를 받지 않았다면, 어느 누가 제 말을 들으려 교회에 오겠습니까? 세상에 훌륭한 강의가 얼마든지 많이 있는데 말입니다.
영생이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
하나님께서 많은 영혼들을 구원 받게 하시려고 저에게 설교하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일 아침마다 설교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세상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도록 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곧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는 일입니다. 3절 말씀에서 영생에 대해 잘 정의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이란 오래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생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거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게 아니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분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지, 오래 사는 것이 영생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래 살려고 하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것에 이기적인 요소가 포함돼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게 영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4, 5절 말씀을 읽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올해를 시작하는 이 때에 예수님께서 중보 기도하신 것이 우리에게도 이뤄지길 축원합니다. ‘아버지여 하늘의 권세로 나를 영화롭게 하시고 가던 길을 계속 가게 해 주시며, 어떤 유혹이 찾아와도 이겨내게 하시고 어떤 시험이 닥쳐도 이겨내게 하옵소서. 가는 길이 좁고 힘들며 고독하더라도 계속 가게 하셔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는 일을 앞두고 하신 중보 기도입니다.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소서’
예수님의 중보 기도를 보면, 에베소서 6장 19~20절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즘 나라를 위해 민주화운동하는 사람들이 기득권층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너희는 뭘 했느냐, 우리가 고생하고 있을 때 너희는 뭘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홍정길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목사님은 감옥에도 안 가신 분이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라고 했더니, 홍 목사님께서 ‘그때 너희들은 감옥에서 투쟁했지만, 나는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천국에 가면 하나님 앞에서 나는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했을 때, 너희는 뭘 했냐고 질문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셔서 함께 웃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가시와 질병을 지녔으며, 감옥에도 있었고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모든 학문을 포기하고 인생 전체를 투자했던 대상은 민족도, 조국도 아닌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한건 자녀를 위한 것도, 감옥에서 나가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바울이 기도를 부탁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에 대해 담대히 말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무서운 세력들 앞에서 목숨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원했던 것은 돌에 맞고 성밖으로 내쳐지는 일이 있더라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용기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비슷한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부인하지 않고 예수님을 똑바로 전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선 ‘아버지여, 아들을 영화롭게 해주셔서 십자가를 지는 것을 피하지 않게 하시며 이 땅에 온 목적과 사명을 완수하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성공하고 높은 위치에 올라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온 목적을 이루기 위해 흔들리거나 포기하지 않고 가던 길을 계속 걷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길을 가게 되길 바랍니다. 유혹을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복음 전파를 위한 부르심을 입은 그대로 전도자의 길을 계속 가기를 바랍니다. 세상과 절대 타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온 힘을 다해 그 길을 가십시오. 그 사명을 완수하십시오. 자신을 위한 중보 기도 속에서 주님의 영화가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해달라는중보 기도를 하셨습니다.
주님,우리도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잊지 않게 하시고 해야 할 사명을 완수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옵소서.
영생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기를 원합니다.
가르쳐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좋은 말씀 > 하용조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자들을 위해 중보기도하신 예수님 2 (0) | 2017.10.26 |
---|---|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신 예수님 (0) | 2017.10.25 |
예수님을 바라보며 삽시다 (0) | 2017.10.21 |
모래 시계를 점검하라 (0) | 2017.10.19 |
환난에서 담대하라 (0) | 2017.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