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목회단상

편견과 독단

새벽지기1 2017. 6. 13. 07:35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앎의 한계를 가진 존재요 경험의 한계를 가진 존재다.

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부분밖에 알지 못하는 절대적 한계를 가진 존재다.

그리고 부분밖에 알지 못하는 인간은 편견에 잘 빠지고 일리에 쉽게 갇힌다.

왜냐하면 깊이 사고하고 성실하게 관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편견을 넘어서려면 줄기차게 사고하면서 인간과 삶의 다양성과 다층성을 깊이 관찰해야 하는데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편견을 성을 높이 쌓고 일리의 방에 안주하며 사는 것이다.

그저 자기가 아는 쥐꼬리만 한 앎과 경험을 내세우며 편견과 일리의 칼,

아니 독단의 칼을 휘두르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말씀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있겠음이라. …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19-21)

 

이 말씀을 듣고 가룟 사람 아닌 유다가 의아한 듯 물었다.

“주님, 어찌하여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요14:22)

참 괜찮은 질문이다.

제자들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에게 예수가 알려지기 원하는 마음,

Inner circle과 Outer circle의 경계를 구별하려 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나온 아름다운 질문이다.

그런데 이 질문조차도 사실은 앎의 한계에서 나온 우문(遇問)이다.

유다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기에 나온 우문이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 -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있겠음이라 - 은 세상이 예수를 육체로만 보기 때문에,

저들은 죽음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에

부활하여 승천한 예수, 살아있는 예수를 보지 못하는 반면

제자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기 때문에

부활하여 승천한 예수, 살아있는 예수를 보게 될 거라는 말이다.

 

이어지는 말씀 -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은

예수를 사랑하는 자만 예수가 사랑하여 그에게 예수를 나타낸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는 예수를 사랑하는 자에게만 보인다,

예수를 사랑하는 것과 예수를 보는 것(아는 것)은 하나라는 말이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은 유다의 앎과 경험의 카테고리를 깨부수어야만 이해되는 말씀이다.

성령이 유다 안에 들어와서 거듭나게 함으로

유다의 앎과 경험의 카테고리를 깨부수어야만 이해되는 말씀이다.

그런데 유다는 자기 앎과 경험이라는 카테고리의 틀 안에서 들었다.

그 결과 예수님 말씀을 오해했다. 아니, 듣지 못했다.

 

인간은 모름지기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는 습성이 있다.

다시 말해 자기 관심사에 속한 것들만 보고 듣는다.

자기 관심사가 아닌 것, 자기 나라에 속하지 않은 것은 아무리 말해주고 보여줘도 못 듣고 못 본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편견과 독단의 칼을 휘두르며 사는 이유다.

예수님께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신 것도

어쩌면 편견과 독단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인간의 습성을 알기에,

귀가 있다고 다 듣는 게 아니고 눈이 있다고 다 보는 게 아님을 알기에 던진 멘트일 것이다(막4: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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