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행복한 사람은 마지막 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 피조물인 인간은 탄생의 시작과 죽음의 종점 사이에 철저히 제한되어 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시공간의 제약이기도 하다. 그런 한계는 원하든 원치 않든 모두가 수용해야 할 숙명이다. 또한 선(先) 경험이 허락되지도 않고 누구와도 함께 나눌 수가 없는 절대 고독의 통로이기도 하다. 그래서 거기에는 은밀한 반항과 사라지지 않는 두려움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면 신앙 안에서 죽음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이기에 당당히 수용하고 극복해야할 과제이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죽음은 이생의 마지막이요 종결이다. 전도서에서 거듭된 ‘헛되다’의 고백처럼, 허무함을 몰고 오는 무자비한 파괴일 수 있다. 예상은 하지만 정확한 예측이 허락되지 않기에 분명 인간에게 더 없이 큰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렇다고 무시하거나 회피할 수 없는 것은 우리들의 삶 전체에 현존하는 실제이기 때문이다. 의식을 하고 있지 않을 뿐 인간의 행위 하나하나 속에 언제나 실제하며 따라다니는 것이 죽음이다.
삶의 마지막 관문으로서 죽음은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다. 적극적으로는 평생을 살아온 삶의 결실이며, 유한성에 갇혀있던 생명이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무한한 생명 속으로 들어가는 엄숙한 전환점이다. 죽음은 마지막 종착역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위한 새로운 출발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면 당당하게 맞이하여야 한다. 그것이 가치 있고 아름다운 종결로 나아가는 길이다. 성경의 인물들은 예외 없이 마지막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분들이다. 구약의 대표적인 예로는, 느보산 위에서 가나안 땅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며 역사의 무대 뒤로 퇴장하는 모세(신 34:1-7), 제자 엘리사에게 겉옷을 남겨주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를 들 수 있다(왕하 2:11). 바울 역시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며 자신의 평생 사역을 아름답게 정리하였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음으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네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 7-8)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마지막의 ‘아름다움’도 연습이 필요하다.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마지막을 당당하고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사전 연습이 아니라 다가올 마지막을 오늘의 실존 속으로 끌어오는 지혜로움이다. 방향을 바로 잡아야 인생의 달리기 경주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전 9:26).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나라이지만, 죽음이라는 반환점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오늘 여기에서 마지막을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의 관점에서 오늘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나은 이유도 그것이다(전 7:2, 4).
마지막의 ‘아름다움’을 가장 모범적으로 보여주신 분은 예수이시다. 효율적인 제자교육을 위하여 언급을 가급적 삼가셨던 예수께서는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거기서 죽임을 당하실 것을 말씀하셨다(마 16:21). 그런 마지막은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에 의해 다시 확인이 되기도 하였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죽 9:31). ‘별세’로 번역된 헬라어 ‘엑소도스’는 ‘떠남’ 혹은 ‘출발’이란 뜻으로 ‘죽음’의 은유적 표현이다. 세상을 떠나는 것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별세를 미리 예고하셨을 뿐 아니라 행동으로 마지막을 준비하셨다. 그것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것인데, 그들의 발을 직접 씻어주시는 것으로 표현되었다(요 13:1-5). 그리고 당신께서 그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처럼 제자들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다(요 13:14).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고하신 것 것처럼, 우리들도 마지막을 과감하게 수용하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예상이 아니라, 죽음을 삶의 중심축으로 세우고, 그것을 존재가치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서 마지막을 실제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방법은 가까운 사람들부터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진정한 하프타임의 경험이 필요하다. 성취를 위하여 달려온 전반전을 마무리 짓고, 의미 추구의 후반전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실존적 죽음을 통하여 육체의 무익함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고상함 때문에 여타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새 생명의 소유자들이다(갈 2:20; 빌 3:8). 하나님 이외의 것을 상대화시키는 것, 그것이 마지막의 '아름다움'을 소중히 가꾸는 방법이다.
[출처] 신앙의 '아름다움'(9): 마지막의 '아름다움'|작성자 viva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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