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권혁승교수

신앙의 '아름다움'(7): 행복의 '아름다움'

새벽지기1 2017. 2. 20. 11:11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전 5:18) 

 

삶의 목적은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문제는 그 행복을 어떻게 얻는가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곧 우리가 행복해지는 길이다. 우리에게서 기쁨을 받으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시기 때문이다.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매 과정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것 역시 하나님의 만족이 곧 우리의 행복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인간의 기본 욕구인 행복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목적이기도 하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여기에서 ‘풍성한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행복을 말한다.

 

오늘의 본문에서 ‘낙을 누리는 것‘은 행복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그 행복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히브리어로 ’토브‘인 ’선한 것‘은 내적 아름다움을 의미하며, 히브리어로 ’야페‘인 ’아름다운 것’은 외적인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곧 내면적인 것과 외면적인 것 모두를 충족시켜주는 아름다움, 그것이 곧 행복한 삶이다.

 

전도서가 제시한 행복한 삶은 다음 세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로, “하나님이 주신 바 그 평생에”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세 가지 한계가 있다. 혈통과 삶의 터전과 수명이 그것이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행 17:26) 삶의 한계를 알고 사는 것이 곧 행복한 삶이다. ‘헛되다’의 반복으로 시작되는 전도서의 핵심 주제는 삶의 허무함이다. 그런 헛됨을 아는 것 자체가 행복으로 나아가는 첫 발걸음이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전 7:4)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지혜의 기본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자신의 수명이 한정되어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잔치집보다 초상집에서 행복한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이 땅에서의 삶이 헛되며 사는 날 또한 한정되어 있음을 수용하는 자는 그런 한계를 넘어서는 방법도 알 수 있다.  해결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전도서의 선언에 들어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행복한 삶은 모든 것이 제한된 이 땅에서 영원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다.

 

둘째로,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삶의 기본적 요소는 먹고 마시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는 수고의 땀을 흘려야 한다. 노동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신성하다. 인간의 노동은 타락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범죄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아 수고의 요소가 추가되었을 뿐이다(창 3:17).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할 일도 함께 맡겨주셨다(창 1:28; 2:15, 19).

 

우리는 무위도식하며 사는 자가 아니라 처음부터 바쁘게 일하는 사람으로 창조하셨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신 28:1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은 때를 따라 비를 내려주시는 것인데, 그것은 ‘네 손으로 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축복의 비도 아무 소용이 없다. 행복한 삶은 거룩한 노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을 자신의 것으로 구체화시키는 것이다.

 

셋째로, “이것이 그의 분복이라”

 

행복은 하나님께서 나누어주신 몫인 ‘그의 분복’을 누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분복’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헬레크’는 ‘나누어진 몫’이라는 뜻이다. 누구에게나 하나님께서 나눠주신 몫이 있다. 몫으로 중요한 것은 개인적 달란트 곧 은사이다. 우리는 자신의 몫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도록 각각 다른 은사를 갖고 태어났다. 하나님은 각자의 특성에 따라 자신들에게 적합한 일들을 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분이시다.

 

베드로와 요한은 각각 다른 생업 현장에서 제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물 던지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부름 받은 베드로는 성격 자체가 외향적이고 저돌적이었다. 그런 베드로는 초대교회를 세우는 개척자 역할을 과감하게 수행하였다. 반면에 해변가에서 그물 깁는 중에 부름을 받았던 요한은 매사가 꼼꼼하고 조직적이었다. 1세기 말 교회가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과 로마정부의 모진 박해를 받아 위기에 처하였을 때, 요한은 마지막까지 생존해있으면서 교회의 취약한 부분을 고치고 회복시키는 역할을 성실히 담당하였다. 자신의 몫에 충실하였던 그들은 행복한 생애를 보낸 신앙의 아름다운 모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