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권혁승교수

신앙의 '아름다움'(8): 멋있는 '아름다움'

새벽지기1 2017. 2. 21. 12:31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 5:38-42) 

 

‘아름다움’은 멋이 있어야 제 맛이다. 신앙도 멋이 있을 때 아름답다. 멋이 있으면 따뜻하고 구수하다. 겉만의 ‘아름다움’은 색깔이 차갑고 날카롭다. 예리한 지성미도 필요하지만 따뜻한 감성과 깊은 영성이 곁들여져야 맛깔의 ‘아름다움’이 된다. ‘아름다움’의 본래 바탕은 내면의 따뜻함이 우선이다.

 

‘멋’은 사전적 의미로 ‘차림새나 행동 등이 세련되고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멋’은 근본적으로 기본을 뛰어넘는 여유이다. 옷은 추위와 더위 같은 외부의 위험을 막아주거나 수치스러운 신체 부위를 가리는 것이 기본 기능이다. 그런 옷에 예쁜 수를 놓거나 어울리는 색상을 갖추면 멋있는 옷이 된다. 막그릇도 무늬를 그려 넣거나 균형의 조형미를 더하면 멋있는 그릇으로 바뀐다. ‘멋‘은 삶의 여유요 넉넉함이다. 그런 여유는 창의성을 통하여 문화라는 꽃을 피우기도 한다.

 

신앙생활도 여유와 배려의 멋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할 멋은 오늘의 본문이 잘 설명하고 있다.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내주고, 오리를 가자면 십리까지 함께 가는 여유, 그것이 신앙의 멋진 넉넉함이다.

 

신앙의 멋은 보복에 관한 교훈과 관련이 있다. 구약에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원칙이 중요하였다. 그것을 ‘동량형벌법’ 혹은 ‘동해복수법’이라고 부른다. 이 법은 구약시대 이전의 함무라비 시대에도 사용이 되었고, 후에는 로마법으로도 채택되었다. 한때 이 법은 잔인한 원시적 법으로 이해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고대사회에서 상당히 발전된 법으로 평가되고 있다. 곧 복수를 정당화시키거나 조장하는 법이 아니라, 피해본 것보다 더 큰 보복을 금지시키는 소극적 의미와 함께 생명을 중시하며 범죄를 예방하는 적극적 의미를 지닌다.

 

받은 손해만큼만 보복하라는 옛날 법의 원칙은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 적용되고 있다. 건전한 사회 구성 요소의 하나로 ‘주고받음’(give and take)의 미덕이 꼽힌다. 주고받는 것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때, 사회는 안정되고 바르게 발전할 수 있다. 다만 주의할 점은 지나친 의무감이나 기계적인 태도이다. 받았으니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지나치거나 주었으니 받아야 한다는 우월의식이 앞서면, 마음과 마음의 주고받음은 막혀버린다.

 

예수께서는 동형동량법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자세를 가르쳐 주셨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받더라도 거절하지 말고 오히려 여유 있게 더 많은 것을 스스로 내어주라는 것이다. 오른편 뺨을 때리는 자에게는 왼편 뺨도 돌려대며, 겉옷을 갖고 하는 자에게는 속옷까지도 주며, 오리를 가고자 하면 십리를 동행하라는 것이다.

 

멋이 기본을 뛰어넘어 넉넉한 여유인 것처럼, 신앙의 멋 역시 여유 있게 배려하며 베푸는 삶이다. 비록 손해가 되더라도 할 일만 하지 않고 더 큰 관심으로 도움을 베푸는 것, 그것이 신앙의 멋이다.

 

준만큼 받고 싶고 피해를 본만큼 보복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보편적 심리인데, 어떻게 요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내줄 수 있을까? 세상의 잣대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멍청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 아니 그렇게 살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세상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자들이다(마 18:21-35). 또한 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그 나라에서 받을 상급과 보상이 있다. 지금 여기는 그날과 그곳을 준비하는 과정이요 기회이다. 이 땅에서의 손해는 마지막이 아니라 그곳에서 더 크고 귀한 것을 얻게 하는 거룩한 통로이다.

 

교회는 신앙의 멋을 추구하는 하나님 백성들이 함께 모여 더 큰 멋을 만드는 ‘아름다움’의 공간이다. 힘을 모아 더욱 크게 만들어가는 우리의 그 멋으로 세상은 더욱 밝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향한 마지막 희망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