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사람에게 허락된 최고의 은총이요 최상의 선물이다. 자유보다 더 영광스럽고 복된 선물은 없다. 자유는 인격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면류관이다. 자유는 인간됨의 절대 조건이요 삶의 필수 요소다. 때문에 아무리 금은보화가 가득하고 권세가 높다 해도 자유를 살지 못한다면, 자율의 방식과 자발의 태도로 살지 않는다면, 그 삶은 결코 아름다울 수도, 향기를 머금을 수도 없다. 오직 자유를 머금은 삶, 자유로써 진리에 순명하는 삶만이 진정 아름답고 성숙한 삶일 수 있다.
그런데 자유를 머금은 삶 - 한없이 아름답고 향기롭고 성숙한 삶을 사는 것은 한없이 어렵다. 사람은 대부분 자유로써 진리를 살아내지 못한다. 오히려 자유로써 반역과 부패를 일삼는다. 자유로써 방종을 일삼거나, 아니면 아예 자유를 반납한 채 노예적 삶으로 치닫기도 한다. 아담 이야기는 자유를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보여준다. 아담은 하나님께로부터 자유를 선물 받았다. 하지만 자유로써 진리를 살아내지 못했다. 자유로써 진리를 범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은 자유를 가지고 진리를 거스르며 산다. 아예 자유를 살지 못하거나.
왜일까? 왜 그 영광스러운 자유를 살지 못하는 것일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자유가 진리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선물한 자유는 단지 자유가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선물한 자유는 진리의 속성을 지닌 자유, 하나님의 성품을 지닌 자유, 진리에 묶인 자유다(삼하2:6, 시40:10).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말씀하신 것도 진리와 자유가 하나로 묶여 있다는 진실을 아셨기 때문이다. 옳다. 자유는 진공 속에 있지 않다. 자유는 진리와 함께 있고, 진리에 묶여 있다. 진리를 통과하지 않은 자유란 세상에 없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죄의 종, 욕망의 종으로 추락했다. 창조자가 아닌 우상에 묶여 있다. 전 존재가 어둠에 길들여져 있다. 하여, 하나같이 진리의 빛을 싫어한다. 자유의 자궁인 진리를 회피한다. 그러니 무슨 방도로 자유를 살 수 있겠는가? 진리의 빛을 싫어하는 사람이 자유를 상실한 채 죄악의 종노릇하는 것이 당연지사 아니겠는가? 진실로 그렇다. 영광스러운 자유를 상실한 채 죄악의 종노릇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유는 인간됨의 절대 조건이요 삶의 필수 요소다. 자유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고, 자유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때문에 모든 인간은 좌우지간 자유의 은총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은 절대 절명의 과제다. 어떻게 해야 할까? 길은 하나밖에 없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진리를 알아야 한다. 자유의 자궁인 진리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자유의 자궁인 진리 속으로 들어가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리인가? 예수님이 진리다. 성삼위 하나님이 모짝 진리이지만 진리의 몸은 오직 예수님이다. 그 예수님 안에 숭고한 자유가 있다. 진리의 몸이신 예수님 안에 영광스러운 자유가 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있는 그 자유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요 거듭남이다. 진실로 그렇다. 구원은 오직 자유의 삶이다. 진리의 속성을 잃지 않은 자유를 사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바로 이 자유의 삶을 배워야 한다. 진리에 자기 몸을 묶은 삶, 죽음을 넘어서는 순명의 삶을 배워야 한다. 오직 이것만이 참 자유를 사는 길이다.
한 마디만 더하자. 믿음은 우리를 종교의 굴레에 가두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우리네 삶을 자유(구원)의 세계로 인도하는 은총의 통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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