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목회단상

종교적 소비자를 넘어 왕 같은 제사장으로

새벽지기1 2016. 9. 18. 07:58


현대사회는 시장사회요 소비사회다. 현대인의 생활은 온통 시장에 종속되어 있고, 현대인의 눈은 시장의 변화를 쫓아간다. 현대인은 판매자와 구매자로 양분되며, 모든 사람은 판매자이면서 동시에 구매자로 사는데 길들여져 있다. 예외가 없진 않으나, 수에 칠 수도 없을 만큼 극소수다. 사실 20세기까지만 해도 시장권력은 정치권력의 발치에 엎드려 눈치를 살폈었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달라졌다. 지금은 시장 권력에 꼬리를 흔들지 않는 정치권력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힘들 정도가 됐다. 시장 권력이 정치권력을 압도해가고 있고, 정치권력을 생산하고 공급하는 데까지 손을 뻗치고 있으니까 말이다.

 

시나브로 시장이 세상을 평정했다. 문학 · 예술 · 언론 · 스포츠 · 교육 · 대학 · 정치는 물론이고, 교회와 사찰까지 점령했으며, 현대인의 영혼까지도 야금야금 점령해버렸다. 물론 예부터 산다는 일에는 사고파는 행위가 동반했었다. 생활에 필요한 것은 여러 가지인데 비해 자가 생산 능력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고파는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시장사회와는 달랐다. 그때는 지금처럼 판매와 구매만이 전부인 비인격적인 거래가 아니었다. 거래는 삶의 일부분에 그쳤으며, 삶과 문화를 실어 나르는 소통의 축복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생활이 온통 거래가 됐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각각 자기 능력을 판매하러 일터(직장)로 나가고, 저녁이 되면 생필품을 구매하거나 여가의 즐거움을 소비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생필품뿐 아니다. 문학 · 예술 · 언론 · 스포츠 · 교육 · 대학 · 정치는 물론이고, 교회의 설교까지도 거래되고 있다. 모든 것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도 당연히 시장이다. 글을 써도 팔리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 그림을 그려도 팔리지 않으면 평가받지 못한다. 사람 또한 시장에 의해서 평가받는다. 연봉이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고, 자기 상품 가치를 흥정하는 연봉 협상이 삶의 조건이 되었다. 진실로 그렇다. 현대사회는 모든 것이 판매되어야 하는 사회, 모든 것을 구매해야 하는 사회, 시장권력과 시장질서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장사회가 됐다.

 

이런 시장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아는 듯 모르는 듯 시장사회의 질서에 길들여져 있다. 판매와 구매라는 생활양식에 적응하도록 내면화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시장질서와 소비자적인 생활양식에 길들여져 있다. 발품을 덜 팔면서도 비교 선택의 다양성을 즐길 수 있는 백화점이나 대형 마켓에서의 소비생활에 익숙해진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생활도 그렇게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언제든지 자신의 상황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시간대의 예배, 다양한 색깔의 모임, 최상의 품질과 최신의 메뉴로 채워진 다양한 문화행사, 차별화된 설교와 교육 프로그램, 유아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연령대에 맞는 적절한 프로그램 등이 완비된 교회를 선호한다.

 

물론 같은 값이면 우아하고 안락한 예배당에서 훌륭한 오케스트라와 찬양대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예배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 자기 형편에 따라 예배드릴 수 있는 선택의 다양성과 자유를 누리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봉사에 참여하는 20%의 열혈 성도들이야 힘들겠지만, 나머지 80%의 성도들은 봉사자들의 헌신적인 서비스를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편안하고 좋겠는가. 더욱이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최상의 예배서비스를 받고 맘 편하게 돌아갈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안락하고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솔직히 영적 소비자로 신앙생활하기에는 대형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열심히 봉사하는 20%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일을 시중들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어서 좋고, 봉사하지 않는 80%의 성도들은 최상의 영적 축복을 맘 편하게 향유할 수 있어서 좋으니까 말이다.

 

사실이다. 종교적 소비자로 사는 것은 매우 편안하고 상큼하고 흥미롭고 만족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인다운 신앙생활일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다운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을 묻고 찾는 구도의 과정이어야 하고, 날마다 구원을 받는 성화의 과정이어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지상 식민지인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그 안에서 함께 하나님나라의 삶을 배우고 연습하는 상호학습의 과정이어야 한다. 분리된 개인에서 인드라망의 생명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거대한 전환의 과정이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을 교회의 일원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며, 이런 삶을 연습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온통 세속이 되어버린 세상을 구원하셨고, 거대한 구원의 세계 속에 인간의 구원을 기획하셨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 사역 또한 우리의 영혼을 위한 것이 아니다. 육체가 죽은 이후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이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것으로의 구원을 기획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 사역의 본질은 심하게 으깨어지고 구겨진 삶의 원형(창조의 원상)을 회복하는데 있다. 하나의 생명이 온 생명으로부터 분리된 채 외롭게 몸부림치는 소외된 삶이 아니라 온 생명과 어우러져 평화의 어깨춤을 추는 조화로운 삶을 사는데 있다. 만인이 만인과 투쟁하는 삶이 아니라 만인이 만인에게 감사하는 삶을 사는데 있다. 바로 이런 삶을 사는 것이 구원이고, 이런 삶으로 충만한 세계가 하나님나라다. 진실로 그렇다. 하나님은 한 개인의 영혼을 위해 구원하지 않았다. 온 생명이 하나님의 생명을 호흡하며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넘실대는 참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 구원하셨다. 그리고 바로 이런 구원의 세계 - 하나님나라를 죄악과 어둠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증언하기 위해 당신의 백성들을 불렀고, 그들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교회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오직 하나님나라를 증언하는 일에 충실해야 하며, 그리스도인인은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 그리고 이 책무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영적 소비자의 천국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이 영적 소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소비자의 편리함과 편안함, 간섭받지 않는 개인의 자유로움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영적인 자기만족에 배불러서는 안 된다. 자기에게 필요한 영적인 상품을 열심히 구매하는 것으로 기뻐해서는 안 된다. 단지 개인으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은 영적인 불륜이고, 구원의 은총과 교회의 교회됨을 무너뜨리는 반역이다.

 

진실로 그렇다. 그리스도인은 영적 소비자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개인이 아닌 지체로 존재해야 한다. 우주 만물이 하나의 생명과 깊이 얽혀 있다는 진실을 유념하고 자기 존재를 말없이 내려놓을 뿐만 아니라 ‘너’에게로 겸허히 나아가야 한다. ‘너’를 하늘의 선물로 맞아들여야 한다. ‘너’를 하늘의 선물로 맞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영적 소비자를 넘어 왕 같은 제사장이 될 수 있다.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것을 양해하시라. 교회는 영적 소비자의 천국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인은 영적 소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영적 소비자로 우글거리는 교회는 결코 주님의 교회가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