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찬미예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마11:28)
현대인들을 짓누르고 있는 가장 크고 무거운 짐은 무엇일까?
질병과 가난만이 짐이 아니다. 부유도 짐이고, 건강도 짐이다.
권세도 짐이지만 책임도 짐이다. 헤어짐도 짐이지만 만남도 짐이다.
미움도 짐이지만, 사랑도 짐이다.
살면서 부닥치는 일 중에서 짐 아닌 게 하나도 없고 인생 자체가 짐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고난의 짐들은 대부분 일시적이며, 지나가는 것들이지만
그보다도 한시적인 고통으로 인해 일평생 하늘을 원망하고 가족을 미워하고 받은 상처로 인해 아무도 믿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이보다 더 큰 고통과 짐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의 온갖 탐욕과 끝없는 욕심은 우리 인생을 핍절하게 만들고, 원만하지 못한 인간관계로부터 비롯된
사랑과 용서의 결핍과 분노의 감정은 우리 영혼의 근원적인 짐이 된다.
'무거운 짐'에 대한 우리의 오해는 질병이나 경제적 어려움 등, 세상살이의 이러저러한 견디기 힘든 일을 면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치우친 기도는 결국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이 세상 염려이며 자신의 욕심을 구하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본질이 피조물이며, 피조적 산물의 피곤함이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무거운 짐'은 정작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짐보다 훨씬 근본적인
우리의 영혼과 관련한 율법의 짐이요, 영적 죄의 짐이고 죽음의 짐이다.
여기서 '율법의 짐'이란, '유대주의의 멍에'를 말한다.
저들의 멍에는 이 시대의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선생들 사상들의 가르침과 음성에 권위를 부여하고
그 상대적 가치들의 정글 속에서 방황하며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장로들의 유전이나, 율법의 조문들로 인간의 삶을 치장하려 한다.
저들의 멍에의 내적 구조와 본질은 그 멍에를 메면 멜수록, 적용하면 할수록 하나님과의 괴리감과 간격을 만들어내고
그토록 얻고자 하는 평안과 안식으로부터는 더욱 멀어지는 회칠한 무덤들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멍에는 왜 쉽고 가볍다고 하는가? (마11:30)
그것은 29절에 나타나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심의 근거와 그 절정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대변되는 주님의 마음과 겸손이요
온유하심으로 표현되고 있는 빌2:5-8절의 말씀에서 정확히 확인되고 있다.
예수님은 온갖 수치와 고통과 모욕을 받으시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그 십자가의 사랑이 나를 살리셨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 뒤의 즐거움을 바라보시며 나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수치를 참으사 결국 하나님 보좌우편의 영광의 자리에 앉으셨다.
이에 대한 히브리 기자의 증언을 보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이다.
주님의 겸손과 온유한 마음을 배우는 것이 참 쉼의 진정한 비결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깊은 영역인 인간의 마음으로부터의 쉼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즐거워하며
단 마음으로 감사하며 즐겨 매는 데서부터 가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기쁨과 즐거움, 감사함과 평안함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쉼의 또 다른 용어이다.
마음의 평안과 안식은 외적인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하면 어떤 역경과 고통도 기쁨과 안식의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고행주의자들이 아니다.
금식을 하고 철야를 하며, 먹지 않고 자지 않으면서 어떤 고행을 통해 수양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주인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래서 언제나 기쁘고 감사하고 즐거운 사람들이다.
내 삶의 구주이실 뿐 아니라 주인 되신 주님 안에 거하는 것, 내 삶의 크고 작은 문제의 주인일 뿐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과 함께 동행 할 때, 그분과 함께 있으면 쉼을 얻는다.
그분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있으면 안식을 얻는다.
어떠한 상황에도 어떤 문제에도 그분이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그분께 맡겨드릴 줄 아는 사람이 참 쉼을 얻을 수 있다.
우리 평생 주님의 마음을 배우자.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매고 나를 배우라"(마11:29)고 권고하신다.
예수님의 성품과 가치관을 배우라는 것이다.
그러면 등에 진 짐 자체가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불평하던 마음, 짜증스런 마음, 억울한 마음이 변하여 능히 감당할 마음, 즐겁기까지 한 마음,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으로 바뀌게 되니 "너희 마음에 쉼을 얻는다."고 했다.
우리가 어떤 짐을 질 때 무겁다는 것은 짐의 물리적인 무게 때문이기보다는 마음의 불편함과 불평,
불만과 원망 등의 만족하지 못한 마음의 상태일 때일 것이다.
우리의 심령 속에 영혼이 편히 쉴 수 있는 마음의 초장이 있어야 한다.
미국의 스타들이 많이 사는 베버리 힐즈라는 곳이 있다. 그림 같고 궁궐 같은 집들이 즐비하게 서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 떼돈을 버는 자들은 정신과 의사들이라 한다.
인기와 명예와 재산을 소유해도 영적 아버지 없는 빈핍한 고아들의 현주소를 보는 듯하다.
시편 23편에서 "쉴만한 물가"라는 단어는 본래 히브리어에서 메누하(menuha)라는 단어로 되어 있다.
이 단어의 의미를 "단순히 아무것도 일을 안 하는 단절의 상태가 아닌 존재 전체가 생명과 기쁨으로 가득 찬 충만의 상태"라고 설명한다.
오늘의 현대 문화에는 우리의 안식의 갈망을 채울 수 있다고 손짓하는 매춘부적인 선전들이 허다하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거룩한 시간이 아니면 인간의 공허함은 그 무엇으로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우리가 예배와 묵상을 통해 안식의 왕이신 그분과 사랑에 빠지고 우주의 왕이신 그분을 사랑하는 더 깊은 사랑 속에 들어갈 때 우리의 안식은 그만큼 견고하고 충만할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쉼에는 참 서툴러 왔다.
쉬고 용납하고 이해하고 인정하며 안식한다는 말은 우리 삶의 언저리에서 멀찌감치 질식하고 있다.
더 열심히, 더 부지런히, 더 철저히 등등 세고 강한 용어들과 친숙해져 왔었다.
바리새인처럼 언제나 율법에 맞게 바지런을 떨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과 사고에 매여 있지는 않았는지 모른다.
그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 '안에 거하는 삶' 만이 진정한 영혼의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안식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관계에서 오는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우침을 얻는다.
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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