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찬미예수
형님!
어깨 통증은 많이 호전되고 회복되고 계신지요?
더운 날씨에도 건강 지속 유의하시고 늘 주의 평안과 감사가 넘치길 기도합니다.
이번 주에는 뒤틀린 지옥론(심판)에 대한 성경적 묵상의 글을 정리해 보려합니다.
죄(죽음, 심판, 지옥), 영생(구원, 천국, 하나님의 나라, 영육의 부활) 등에 대한 글을 지피면
금새 교리적인 것으로만 치부하려는 선입견 때문에 서로의 간격과 리스크가 너무 크게 존재한다.
어느 것을 주제로 하든 자유로움과 신선함의 여지보다는 무거운 율법의 장벽이 두껍게 놓여있다.
예를 들어 '심판'하면 우리는 일단 천국과 지옥을 생각한다.
그만큼 심판이라는 단어는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심판에 대한 믿음은 우리 삶을 위축시키는 요인이 아니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 벌을 주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해 오신다.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정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심판은 자유의 완성이요, 의의 회복이다.
죄와 죽음과 심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와 영생과 구원의 개념을 거쳐 인식되어야하는 실체들이다.
그러므로 구원 없는 심판 없고, 심판 없는 구원 없다.
안타까운 것은 '심판' 하면 사람들이 대개 지옥 불을 연상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자신의 삶을 유배시키고 산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지옥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강조해 교인들을 묶어두려 한다는 혐의를 갖고 있다.
누구든 예수님을 만나면 자기들 속에 있는 위선의 실체를 볼 수밖에 없다.
그분은 인간의 온갖 실상을 드러내심으로서 파멸에의 선고가 아니라, 구원에의 초대로 인도하신다.
우리는 거듭거듭 이 초대 앞에서 살고 있다.
세상을 심판하고,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목적도 아니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은 오직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다(요3:16-17).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가 심판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요한은 말한다(요3:18).
그런데 이 심판과 정죄는 하나님의 능동적 행위가 아니다.
다만 인간이 스스로 심판의 자리를 고수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너무 쉽게 가룟 유다에 대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하고"(행1:25)라는 이 한 말씀을 단숨에 지옥에 갔다고 단정해버리고
더 이상의 어떤 대화도 진전할 수 없도록 언어의 숨통을 쥐어버린다.
그러나 요한복음 말씀을 참조해 보면 가룟 유다가 '제 곳'으로 간 것은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부인하여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진 것과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이 훨씬 더 건강하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요16:32).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말이나,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식으로 너무 쉽게 단죄해버리면 안 된다고 하면
어떤 대화의 행간보다 그럼, 예수 안 믿어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말이냐며 이 말 자체가 또 다시 걸림돌이 될 뿐이다.
물론 빛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거절하는 자체로 이미 정죄와 심판 아래 놓여있다.
빛이 세상에 왔으나 어둠이 빛을 싫어하므로 어둠의 자리에서 여전히 죽음을 살고 있을 뿐이다.
성경은 자기들의 악행이 드러날까봐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고 말한다(요3:20).
어둠의 자리에서 죽임살이를 하는 것이 곧 심판이라고 말한다.
진실로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의 자리로 끌고 가는 게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 행위가 악하기 때문에 빛으로 나오지 않고 심판의 자리, 죽음의 자리에 이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악평을 받았던 가롯 유다에 대해 성경은 굳이 지옥에 갔다고 말하지 않고 '제 곳'으로 갔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바울은 사망이 왕 노릇한다고 했듯이(롬5:17) 악은 분명히 심판을 받고,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신다.
그러나 심판은 멸망, 파멸 등의 구더기도 죽지 않는 지옥 운운하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생명의 결정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비유다.
심판은 생명이며, 구원이다.
심판의 날은 생명의 실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순간이기 때문에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의 날이다.
그것은 더 이상 이 세상의 생명 메커니즘에 좌우되지 않는 생명이다.
이런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과의 영원한 일치다.
천국이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라면 지옥은 절대적인 죽음의 세계다.
천국은 희망이 가득한 세계라면 지옥은 절망이 가득한 세계다.
천국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세계라면 지옥은 그 대면으로부터 제외되는 세계다.
전자가 사랑의 세계라면 후자는 사랑이 없는 세계다.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나머지 질문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구원이 얼마나 크신가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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