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옥한흠목사

제자훈련 우울증

새벽지기1 2016. 8. 9. 07:49


내가 처음 제자훈련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사역 때문이었다. 제자훈련을 받는 젊은이들에게 변화가 일어나고 대학부가 부흥하는 것을 보면서 신이 났었다. 그때 난 제자훈련이 나의 목회의 성공을 열어 줄 마스터키가 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제자훈련을 제대로 하면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은 심령들이 살아서 일어나고 고목처럼 생명이 말라 버린 교회도 소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후 제자훈련이 성경적, 신학적으로 얼마나 타당한 것인가를 연구하면 할수록 목회자로서 바른 길을 찾았고, 제자훈련 말고는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앞날에 대한 불안도 사라졌다. 천하가 다 내 것인 양 자신감에 차 있었다. 개척교회를 시작하고 첫 예배에 나온 9명의 영혼들을 내려다보는 내 심정은 마치 승천하시기 직전 11제자들을 바라보시던 주님의 심정과 흡사했는지도 모른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주님의 눈에는 11명의 제자가 곧 모든 족속이었다. 나에게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성도들이 수천수만의 제자들로 보였다. 

 
그후 제자훈련이 주는 목회의 열매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쓴 책은 큰 반향(反響)을 불러 일으켰고, 세미나에는 지원자들이 줄을 섰다. 그럴수록 나는 더 많이, 더 크게, 더 당당하게 예수의 제자를 만들어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렇다고 나를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자신도 모르게 제자훈련에 관한 이야기가 꽤 오랫동안 하기 싫어지는 것이었다. “예수처럼 되자”, “작은 예수가 되자”라는 말을 입 밖에 내는 것이 너무 겁이 났다. 그런 소리를 하는 자신이 가소롭고 위선자처럼 보였다. 어쩌다가 내가 “예수처럼 되자”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목사가 되었는지 생각만 해도 부끄러웠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나와 제자훈련을 연관시켰고, 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왜 이런 증세가 생기게 되었는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난 남을 위해서는 몸이 망가지도록 제자훈련을 시켰지만 정작 내 자신을 위해서는 그렇지를 못했다. 자연히 나는 입으로 떠드는 것을 빼 놓고는 훈련을 받는 평신도들보다 나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남을 열심히 훈련시키다 보면, 나는 자동적으로 ‘예수처럼 되고 예수처럼 사는’ 제자의 대열에 합류하는 줄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를 뜯어보아도 내가 예수를 닮았다는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은 나를 몹시 어두운 침체의 늪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런 반갑지 않은 내적 갈등과 고민을 나는 ‘제자훈련 우울증’이라는 이름을 붙여 본다. 제자훈련에 전력하는 목사치고 이런 증세를 한두 번 경험하지 아니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목회자로서의 양심이 살아 있다면 피할 수 없는 위기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제자훈련은 지도자에게 큰 부담이다. 

 
내가 이런 속내를 열어 보이는 것은 제자훈련의 첫째 대상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자는 데 있다. 제자훈련의 진수(眞髓)는 제자를 ‘만드는 데’ 있기보다, 제자가 ‘되는 데’ 있다. 자신의 ‘제자 됨’이 미흡하면 언제든지 이런 영적 위기를 겪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진실해야 한다. 말씀과 평신도를 양면(兩面)의 거울로 삼아 부지런히 자신의 제자 됨을 점검해야 한다. 

 
지금 난 우울증에서 벗어났다. 그 이유는 완전한 자리에 올라섰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처럼 되라”고 요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체험하는 독특한 감격과 행복을 맛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무나 보고 예수처럼 되라고 명하시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