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로마서묵상

로마서 묵상 106 (롬 6:1-2) [정성욱교수]

새벽지기1 2016. 5. 31. 07:18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1-2)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했으니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더 짓자꾸나!

라고 생각하며 방자하게 살아가는

율법폐기론자, 도덕법폐기론자,

방종주의자들이 교회 역사상 존재해 왔습니다.

 

현재 국내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박옥수 계열의 구원파가 이런 주장에 근접한 주장들을 펴지요.

 

사도바울은 확실하게 선언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영어로는 By no means! 또는 God forbids!등으로 번역을 하고 있지요.

절대로, 결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의 지배와 통치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죄와 단절되었다 즉 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어

죄와 완전히 단절되게 되었습니다.

죄의 지배와 통치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6장 11절과 연결해서 읽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즉 원리적으로, 신분적으로 죄와는 완전히 단절된 자로 자신을 여기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실재적으로는 아직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때로 범죄할 수 있음을 성경은 숨기지 않습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죽고 죄와 완전히 단절된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요일 1:8)

 

박옥수 계열의 구원파는 신분상/원리상 죄와의 단절과

현실상/실재상 범죄할 수 있음 사이의

갭을 무시하고 신분상/원리상의 단절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었다가 부활하기 전까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계속적인 죄와의 투쟁 과정이며

계속적인 실패의 가능성으로 인한 계속적인 회개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는 우리 죄를 주님께 자백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또는 때마다 죄를 자백하는 과정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는 경험입니다.

이런 자백의 과정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용서의 은혜를 한 번 더 상기하고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 라는 선언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