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하던 때를 회상하면서 칼빈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굴복시켜 가르침을 잘 듣도록 온순하게 하셨다”고 말했다. 그 심오하고 지속적인 내적 변화의 결과로서 그는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으로 살고 저술활동을 하였다. 「기독교 강요」 맨 앞부분에서 그는 하나님은 어떻게 알려지는가라는 주제를 인상깊게 다룬다. 그의 저서 전체에는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엄, 주권적 권능, 그리고 우리 인간들과 현재 함께 하시는 것에 대한 경외감으로 가득차 있다.
분별력있는 독자는 저자의 지성만이 아니라 그의 전 영적 및 감정적 존재까지도 그의 저작에 실려 있음을 깨닫는다. 칼빈이 후에 시드니 경의 “네 마음을 보라, 그리고 써라”라는 아름다운 표현을 이용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한 그는 “마음이 신학자를 만든다”는 고대 격언의 좋은 한 예이다. 그는 직업적인 신학자가 아니라 질서있게 사고하는 천부적 재능을 소유하고 그의 믿음의 의미들을 글로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의 충동을 따른 독실한 신앙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책을 가리켜 “신학 대전”이라 하지 않고 “경건 대전”이라고 하였다. 그의 왕성한 정신력의 비결은 바로 그의 경건에 있으며, 그 경건의 산물이 그의 신학이다. 다시 말해 그의 신학은 충분히 서술한 그의 경건이다. 그의 과제는 “경건의 총체와 구원 교리에서 알아야 하는 제반 사항”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의 본서를 준비하면서 그의 유일한 목적이 “순수한 경건론을 견지함으로써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라고 그의 라틴어 최종판 서문에서 주장하였다.
현대인들에 대해 “경건”이란 말은 그 말이 역사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의미들과 지위를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그 말은 이제 비효과적이며 종교적인 감상적 태도나 위선적인 겉치례를 연상케 하는 의심쩍은 것이 되었다. 칼빈이나 그의 동시대인에게 경건이란 말은 고대의 이방 저술가들이나 기독교 저술가들에게 있어서처럼 불쾌한 함축이 전혀 없는 훌륭한 단어였다. 경건이란 가족이나 국가 또는 하나님에 대한 신실하게 헌신하는 것 즉 칭찬할 정도의 충절을 지키는 것이다. 칼빈은 한결같이 주장하기를, 경건은 하나님에 관한 건전한 지식을 얻기 위한 선결요건이라고 하였다. 이 원칙을 처음으로 언급할 때, 그는 경건을 “하나님께서 주신 유익들을 앎으로써 생겨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결합된 경외심”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하였다.
경건이란 사람들이 “모든 것을 것을 하나님의 덕택으로 돌리고 자신들을 양육하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돌보심 바로 그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이 누리는 모든 선한 것을 지으신 분임을 인정하는” 형태로 표현된다. 경건(pietas)이란 말은 칼빈의 저작들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며, 「강요」에서는 마치 세속적인 지성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일깨워주기 위해 울리는 경종처럼 되풀이해서 나오고 있다. 에밀 도머그, “칼빈에게 있어 종교와 경건은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라고 말한다. 미첼 헌터, “경건은 그의 인격의 본질이다. 그는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학문 자체로서의 신학이란 전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종교가 그에게 의미하는 모든 것을 지지하는 뼈대로서의 신학에 전념하였다”. 감사와 사랑과 순종은 건전한 신학의 필요불가결한 선조건이다.
- 성문출판사, 한영『기독교 강요』1권, pp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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