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돈목사

낸시 랭의 신학 펀치를 보고 느끼는 아쉬움

새벽지기1 2016. 2. 5. 07:23


오늘 처음으로 신학펀치라는 CBC 프로그램을 보았다. 예수님이 온전한 사람이심에 대해 논의하는데 교의학자로서 듣기에 아슬아슬하고 위험스러운 대목이 많았다. 한 교수는 예수님이 광야시험을 당하시면서 사단이 유혹한 대로 돌을 떡으로 만들고 천하만국을 소유하고픈 불순종의 욕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욕망이 전혀 없었다면 어떻게 예수님이 진정으로 시험과 유혹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느냐는 논리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야한 생각을 하고 몽정을 했겠느냐는 낸시 랭의 엉뚱한 질문에 대해서도 그 교수는 주저 없이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그 자리가 예수님의 인성을 전문적으로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또한 대중을 상대한 가벼운 신학적 담화에서 던진 그 교수의 몇 마디 말을 꼬투리 잡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 신앙의 중대한 진리에 관해 언급하면서 좀 더 사려 깊고 신중한 발언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시다. 그러나 그 분은 죄로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시다. 히브리서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다고” 했다(히4:15).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죄의 근원과 좌소는 마음이다.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한 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도 야한 생각을 하셨다는 것은 그 분도 이미 마음으로 간음의 죄를 범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야한 생각이란 단순히 여인이 아름답다거나 섹시하다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자와 성관계를 갖고 싶다거나 성적인 행위와 관련된 생각일 것이다. 그리고 남자가 몽정을 하는 것은 대개 꿈속에서의 성행위에서 기인된다. 구약 율법에서는 몽정을 부정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몽정은 잠재의식 속에 억눌려있는 성적 욕망의 표출인 경우가 많다. 더욱이 예수님이 사단이 유혹한 대로 불순종의 욕망을 가졌다는 발언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드는 큰 실언이다. 


죄의 근원은 불순종의 욕망이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다(약1:15). 성경이 말하는 죄는 단순히 불순종의 행위만이 아니라 불순종의 마음, 욕망이다. 불순종의 욕망을 가졌다, 혹은 품었다는 것은 이미 마음으로 죄를 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는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시면서 우리와 똑같이 육신의 약함 가운데 처절한 배고픔을 견디며 시험을 받으셔야만 했다. 그에게도 똑같이 사단의 유혹이 엄습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이 그 유혹에 끌려 불순종의 욕망을 품게 되었고 그 욕망과 예수님이 치열하게 싸우셔야만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예수님이 죄에 굴복했다고 보는 것이다. 죄와 사탄의 유혹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불순종의 욕망을 품는 자체가 죄의 근원이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이 시험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가. 가장 거룩하신 분에게는 자신이 경외하는 하나님을 거역하라는 사단의 사악한 유혹과 암시 자체가 감당하기 힘든 시험이었던 것이다. 불순종의 죄를 밥 먹듯 범하는 죄인들에게 그런 유혹은 아무 괴로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죄의 유혹이 달콤할지 모른다. 그러나 죽기까지 하나님을 순종하신 그 분에게 그 하나님을 반역하라는 마귀적인 음성은 그의 마음에 참담함을 느끼게 하는 시험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시다. 그 분을 하나님이라는 렌즈로만 바라보므로 예수님의 온전한 인간됨의 면모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으면서도 다른 분이시다. 죄로 말미암아 속속들이 부패한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의로우신 분이다. 


우리는 지금 정상적인 인간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심각하게 오염되고 뒤틀린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 마음의 모든 생각과 욕망과 상상까지 죄로 오염된 우리와는 달리 예수님은 성령으로 성화된 죄 없는 인간성과 청결한 심령을 가지신 분이다. 아직 부패성이 남아있는 우리 신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해도 야한 생각이나 욕망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을 자주 체험하게 되는데 하물며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항상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이셨던 그 분을 야한 생각과 욕망이나 품고 사는 우리 수준으로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진정한 사람 되심을 곡해하는 것이다. 


그 분은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입으셨다. 그러나 그 분은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이다(골2:9). 그 분은 인간으로 존재했던 모든 육체의 때에도 완전한 하나님이시지 않은 적이 한 순간도 없었다.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 분을 부패한 인간과 같은 수준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의 비정상적인 인간성을 그 분에게 그대로 투사해서 예수님을 이해하는 것은 그 분의 죄 없으심과 그 분의 신인되심을 부인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성경학자들은 자기 생각을 성경적이라고 말하기 전에 2천년 교회 역사 속에 우리의 신앙선진들이 치열하게 고민하여 연구한 역사적인 기독교 교리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과 존중이라도 가져주면 좋겠다. 또한 내시 랭의 신학펀치가 기독교의 중대한 교리에 대해 논의하기에는 부적합한 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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