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생명에 붙들린 사람들(사도행전5:17-33)

새벽지기1 2015. 12. 7. 10:28

 

오늘 이야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사건이 있고 난 후에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 당시의 예루살렘은 두 세력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고, 종교적으로는 유대교가 지배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권세는 대단했습니다. 종교적으로뿐 아니라 사법적인 영향력도 행사하는 예루살렘의 실세였습니다. 21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그의 동료들이 공회와 이스라엘 원로들을 다 모았다고 한 것을 보면 예루살렘은 제사장이 지배하는 종교적인 사회였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도 두 세력이 간여했습니다. 예수의 처형을 집행한 것은 로마의 정치 세력이었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고 단죄하고 죽음으로 내 몬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는 골치 덩어리였습니다. 예수는 기존의 종교 질서를 어지럽히고 위협하는 위험한 인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길들일 수 없는 자유의 영혼의 가진 자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들은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고 나서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이제는 됐다’며 한 시름을 놓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습니다. 예수는 죽었지만 죽은 게 아니었거든요. 예수는 3일 만에 부활했고,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오히려 더 힘을 얻게 되었거든요. 예수가 죽을 때까지만 해도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정말 별 볼 일 없는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이 달라졌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입과 몸을 통해서 예수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가 낫고 앉은뱅이가 걷는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를 죽이기 전에는 예수 혼자였는데, 이제는 예수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열 두 제자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제자들이 또 다른 예수가 되어서 예루살렘을 들쑤시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베드로가 한 번 설교하면 삼천 명, 오천 명씩 회개하는 엄청난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이 급속하게 예루살렘 전체로 퍼져 나갔습니다(v.28).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죽인 자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상당히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정말 난감했을 겁니다. 하지만 쉬운 길이 없는 것도 아니지요. 종교 지도자들은 힘이 있었으니까요. 제자들의 입을 닫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과 그의 동료들은 일단 제자들을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더 기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자들을 옥에 가두고 산헤드린 전체 회의를 소집한 그 날 밤에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감옥 문을 열고 제자(사도)들을 이끌어 내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더욱이 천사는 사도들에게, 성전에 가서 이 생명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당당하게 말하라고 격려하기까지 했습니다(v.19-20). 그러니 제자들이 얼마나 용기 충천했겠습니까. 풀려난 사도들은 날이 밝자말자 성전으로 달려가서 이전보다 더 담대하게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선포했습니다.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혀 모르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날이 밝자 사도들을 감옥에서 불러내 심문하려고 모였습니다. 그런데 끌려 나와야 할 제자들은 끌려나오지 않고 엉뚱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감옥 문은 철통같이 잠겨 있고, 문마다 간수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제자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소식을 들은 공회원들이 얼마나 어리둥절했겠습니까? 얼마나 어안이 벙벙했겠습니까?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을 겁니다. 바로 그때 기막힌 보고가 또 올라왔습니다. 옥에 갇혀 있던 사도들이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이 보고를 들은 경비대장은 사색이 되어 즉각 부하들을 데리고 사도들을 체포하러 성전으로 출동했습니다. 사도들은 도리 없이 체포되었습니다. 공회 앞으로 끌려왔습니다.

대제사장이 사도들을 바라보더니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정말 골치 아프다는 듯이 소리쳤습니다. ‘내가 일전에 너희를 불러서 어떠한 경우에도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너희는 너희 가르침으로 예루살렘을 가득 채우고, 그 사람의 죽음을 우리 탓으로 돌리려고 하느냐?’(v.28). 대제사장은 지금 예수의 죽음이 자기들 탓이 아니라고 발뺌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죽인 것이지 자기들이 죽인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물론 외형적으로 보면 로마의 정치권력이 예수님의 죽음을 집행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죽인 자들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그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진실입니다. 그들의 양심이 알고 있는 진실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지금 발뺌을 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은폐하고 있습니다. 파죽지세로 번져가고 있는 예수의 부활 소식과 예수의 이름으로 많은 병자들이 고침 받는 이적을 보면서도, 속으로는 당황스럽고 시기심에 어찌할 줄을 모르면서도, 겉으로는 예수의 피에 대해 자기들의 손이 깨끗한 척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사도들까지도 처치해버려야겠다는 분노가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저들이 베드로의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당장 죽이려고 한 것을 보면(v.33), 저들의 마음속에 분노와 시기심이 가득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사도들에게 진실 아닌 것을 퍼뜨리고 다닌다고 추궁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손은 깨끗한데 왜 살인 교사범으로 모느냐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저들은 아마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면서 자기들의 손은 깨끗하다고 강변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가증스럽고 비겁하고 뻔뻔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만일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었다면,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었다면 사태의 진실을 아는데 관심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별 볼 일 없던 제자들이 왜 갑자기 용기백배하여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지,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들이 낫는 사태의 진실이 뭔지를 알기 위해 관심을 기울였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런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들의 행태를 관찰해 보십시오. 예수를 죽이기 전이나 죽이고 난 후나 똑같습니다.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고서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여 제자들이 사도로 변화된 것을 보면서도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저들의 행태는 정말 감동스러울 정도로 일관되었습니다. 자기들의 전통과 가르침을 고집하고 기득권을 지키는 데만 관심이 있었지 메시아의 통치 현실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기존의 종교 체제와 가르침 안에 갇혀서 꿈쩍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옥에 갇힌 것은 사도들이었지만 실제로 감옥에 갇힌 자들은 저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산헤드린 공회원들이야말로 고정관념의 감옥, 기존 체제의 감옥, 기득권의 감옥, 거짓의 감옥에 갇혀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많은 이들이 맘껏 자유를 구가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갇혀 있는 자들이 더 많습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갇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 선입견에 갇혀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갇혀 있고, 자기 경험에 갇혀 있고, 자기 감정에 갇혀 있고, 시대의 우상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정리해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갇혀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갇히지 않을 수 있지만, 내가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다 갇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절대적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단히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백사장의 모래알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하나마저도 온전치 못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일평생 경험하고 깨우쳐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정신적으로, 감성적으로, 감각적으로 경험하고 깨우친 것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마저도 불완전하고 희미한 것에 불과합니다.

 

믿음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예수, 내가 배운 신학,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 온전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세계, 성경의 세계는 무궁무진합니다. 어떤 신학자나 영성가도 다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심오합니다. 사람이 지성과 영성으로 포착할 수 있는 그런 만만한 세계가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 인식과 경험을 상대화할 줄 모르면요 독선에 빠지게 됩니다. 편견과 고정관념과 상식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확신하고 그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자기만 옳고 다른 사람은 다 틀렸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결국 자기가 피조물이라는 진실을 망각하게 되면 언제든지 바리새인이 될 수밖에 없고, 자기 안에 갇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달랐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죽음을 외면하기는 했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우침을 얻고 나서부터는 달랐습니다. 이전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겁이 많고, 이해관계에 밝고, 자기중심적이고, 정치적인 욕망에 붙잡혀 있던 제자들이 이제는 모든 것을 걸고 예수의 부활 생명을 증언하고 가르치는데 몸과 영혼을 쏟는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최고의 실력자들이 모인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호된 추궁을 받으면서도 당당했습니다. 아주 담대하게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옳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변화된 삶과 죄 용서의 선물을 주시려고 예수를 왕과 구주로 삼아 그분 오른 편 높은 곳에 두셨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성령께서도 이 모든 일을 확증해 주고 계시다.’(v.29-32)고 소리쳤습니다. 그랬습니다. 사도들은 정말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논리적으로 예수 사건의 진실을 설명했습니다.

 

여러분, 별 볼 일 없던 제자들이 어떻게 이처럼 당당하고 지혜롭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로 변한 것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흥분해서일까요? 예수의 부활 생명을 경험한 것이 너무 놀라워서 앞뒤 보이는 게 없어서일까요? 성령에 정신을 빼앗겨서일까요? 아닙니다. 베드로의 설교나 공의회 앞에서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사도들이 체포당하거나 감옥에 갇힐 때 거칠게 저항하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들은 감정적으로 들떠 있지도 않았고, 정치적인 야욕을 가지고 세력화를 꾀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오직 비폭력 무저항으로 일관했습니다. 매우 침착하고 이성적이었습니다. 더욱이 성령은 정신을 빼앗는 영이 아닙니다. 성령은 정신을 들게 하는 영입니다. 진리의 영입니다. 사도들은 절대로 넋 나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제자들이 변한 것은 부활이라고 하는 기이한 현상 때문에가 아니라 부활 생명 때문이었습니다. 부활 생명과 부활의 세계를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나라를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나라 비유에 보면, 하나님나라는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는 말씀이 나옵니다(마13:44). 어떤 사람이 밭에 깊이 감추어 있던 보화를 발견하면 몰래 숨겨 두고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집에 돌아가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것처럼 하나님나라를 발견한 사람도 그런다는 것입니다.

 

바로 사도들이 그랬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부활 생명이라는 보화, 하나님나라라는 보화를 발견하자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 생명을 전하는데 올인했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이 가짜이거나 가치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과 삶이 저주받은 것이거나 죄악된 것이어서가 아닙니다. 부활 생명과 부활의 세계가 너무 영광스러운 보화였기에 사람들에게 그 기막힌 소식을 전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랬던 것이지 이 땅의 생명과 삶이 하찮아서 그랬던 게 아닙니다. 이 땅의 생명과 삶은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선물입니다. 여전히 아름답고 소중한 값진 선물입니다. 한없이 감사해도 부족할 만큼 풍요롭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부활 생명과 부활의 세계에 비하면 이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울도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기 안에 일어난 변화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8).

 

그렇습니다. 바울과 사도들이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부활 생명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 생명보다 더 위대하고 값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예수의 부활 생명, 하나님나라의 보화를 발견하게 되면 그 외의 것들은 몽땅 시시하게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 생명과 하나님나라가 너무 영광스럽고 아름답기 때문에 그 나라에 참여하는 것 외에는 그 무엇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뭘 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과 승리와 건강과 부와 성공을 보십니까? 아니면 부활 생명과 하나님나라를 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과 승리와 건강과 부와 성공을 보고, 그걸 얻기 위해 예수님에게 매달리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본래 평안과 승리와 건강과 부와 성공 같은 건 없습니다. 예수 안에는 단지 평안이 아니라 어떤 역경이라도 뚫고 나가는 힘이 있고,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는 승리가 아니라 죄악에 굴하지 않는 승리가 있습니다. 단지 건강이 아니라 병약함 중에도 감사를 잃지 않는 능력이 있고, 부와 성공이 아니라 부와 성공을 탐내지 않을 수 있는 진정한 부유함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을 주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신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왜 예수를 믿으십니까?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일까요? 마음을 수양하기 위해서입니까? 마음의 위로를 받기 위해서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배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 이상에 있습니다. 마음을 수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활생명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나라에 참여하면 마음의 수양은 절로 이루어집니다. 하루아침에 성인군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목표가 달라지고 가치관이 새로워집니다. 물론 마음의 위로는 절로 받게 되지요. 그렇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긴 부활 생명,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는 하나님나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부활 생명,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