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충만한 삶의 길( 마태복음6:25-34)

새벽지기1 2015. 12. 7. 10:56

 

여러분은 도시의 빌딩 숲을 걸을 때 어떤 느낌을 받으시나요? 생명의 교감을 느끼시나요? 마음과 영혼의 교감을 느끼시나요? 쇼윈도에 화려하게 전시되어 있는 명품에 눈을 빼앗긴 채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의 불이 활활 타오를 수는 있겠지만 마음과 영혼의 교감을 느끼기는 어려우실 겁니다. 반대로 숲속을 거닐 때는 어떤 느낌을 받으시나요? 아마 도시의 빌딩 숲을 걸을 때와는 전혀 다른 걸 느끼실 겁니다. 뭔가 알 수 없는 생명의 교감을 느끼실 겁니다. 나무가 내뿜는 생명의 기운을 들이마실 때마다 몸과 영혼의 모든 것들이 살아나는 것 같은 상쾌함과 풍요로움을 느끼실 겁니다. 심신의 편안함을 느끼실 겁니다. 저는 그런 상쾌함과 생명의 교감 때문에 숲길 걷는 걸 매우 좋아합니다. 숲길을 걷다 보면 나무하고 말을 주고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나무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때로는 나무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도 합니다. 이렇게 나무하고 말을 주고받다 보면 사람이나 책에서는 들을 수 없는 큰 가르침을 배울 때가 있습니다. 제가 나무에게서 배운 큰 가르침 중 하나는 충만한 존재로 사는 태도입니다.

 

나무는 존재와 삶이 하나입니다. 사는 것이 곧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하는 것이 곧 사는 것입니다. 한국의 봄을 수놓는 진달래를 보십시오. 진달래는 소나무나 플라타너스처럼 키가 크지 않다고 불평하는 법이 없습니다. 키 큰 나무들 속에 난장이처럼 못난이처럼 숨어 있지만 한 번도 소나무가 되겠다고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그저 봄이면 제일 먼저 산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것으로 한없이 행복해 합니다. 진달래는 오히려 키 큰 나무들 속에 숨어서 피기 때문에 더 아름답고 더 빛이 납니다. 목련처럼 꽃잎이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 않지만 진달래만의 멋과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진달래는 진달래로서 훌륭하게 존재하며 삽니다.

 

사람은 다릅니다. 사람은 나무처럼 존재만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자기 존재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이 비교합니다. 친구하고 비교하고, 형제하고 비교하고, 스타들과 비교하고 하다가 조금이라도 부족하다 싶으면 속이 부글부글 끓습니다. 나는 왜 키가 작은지 모르겠다고, 왜 장동건처럼 꽃미남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왜 박정현처럼 노래를 잘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고, 왜 삼성가에 태어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리고는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많은 영광을 얻기 위해 아등바등 애를 씁니다. 그래요.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지고는 못 살아요. 1등이 되고, 세계 최고가 되어야 비로소 만족한 웃음을 짓는 게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는 게 참 힘들고 피곤합니다.

 

이렇게 힘들고 피곤하게 살아가는 인생을 향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6:34). 여러분, 예수님이 왜 이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일차적으로는 내일 일을 염려해봐야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일 겁니다. 내일 일을 염려한다고 해서 내일 일이 달라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은 매우 잔인합니다. 내가 발을 동동 구른다고 해서 내게 올 일이 피해가지 않습니다. 내가 염려 하나 안 하나 닥칠 일은 닥치는 게 인생입니다. 사람이 염려하는 게 별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데는 더 깊은 배경이 있습니다. 내일의 염려가 오늘의 삶을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내일을 염려하느라 오늘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우리 사는 걸 한 번 보십시오. 온통 내일을 위해서 삽니다. 오늘 만족스럽지 못한 것을 내일은 채우고야 말겠다고 기염을 토하면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게 우리네 인생살이입니다. 정작 살아있는 순간은 오늘인데 내일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때문에 오늘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온통 과거와 미래로 꽉 차있을 겁니다. 건강을 잃으면 어떡하나, 경제가 어려워지면 어떡하나, 지금 아껴가면서 열심히 저축을 하고 있는데 아파트 값이 오르면 어떡하나, 취업이 안 되면 어떡하나, 좋은 사람 만나지 못하면 어떡하나, 끝도 없는 염려가 여러분 마음속에 있을 겁니다. 고등학생들은 대학 입학이라는 미래의 목표를 위해 고등학교 3년 세월을 다 보내고 있고, 대학생들은 졸업 후 취업이 워낙 어렵다보니 입학하자말자 취업 때문에 고민하며 취업 준비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대학생활은 오늘에 충실했습니다. 대학생활 자체를 즐겼고, 당시의 사회 문제를 놓고 고민도 하고 데모도 하면서 대학생활에 충실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대학생활은 졸업 후 취업에 붙잡혀 있습니다. 도대체가 오늘이 없습니다.

 

사실 대학시절에 생각하고 배우고 경험해야 할 것들이 정말 많습니다. 자아발견, 세상의 평화와 빈부 문제, 신앙의 재정립, 사회의 다양한 이슈들, 새로운 도전과 경험, 깊이 공부해야 할 전공, 젊어서 꼭 읽어야 할 수많은 책들, 연애, 정말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취업 준비보다 훨씬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대학시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요. 그런데 졸업 후 취업 준비하느라 정작 대학시절에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은 놓치고 있습니다.

 

이런 인생을 향해서 주님은 내일 염려는 내일 해도 충분하니 오늘은 오늘의 삶에 충실하라 말씀합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느라고 정작 오늘을 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v.29)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솔로몬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호사와 영광을 다 누린 사람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가 누린 영광조차도 들에 핀 꽃 한 송이의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성취한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컴퓨터 하나만 보아도 얼마나 놀랍고 경이롭습니까. 사람이 우주를 왕래하는 것도 놀랍고, 인공위성을 쏘아서 각종 정보와 전파를 송수신하는 것도 참 경이롭습니다. 첨단 과학으로 만든 무기의 정확성과 파괴력도 놀랍고, 의료기술의 발달 또한 감동적일만큼 뛰어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할 수 없는 진실이 있습니다. 그 모든 업적이 아무리 놀랍고 감동적일지라도 길가에 피어 있는 꽃 한 송이의 영광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뒤집으면 이런 이야기가 됩니다. 인간의 수고와 문명의 발전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충분하다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충분한 세상, 영광으로 가득한 세상을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괜히 나서서 뭔가를 이루겠다고 입에 거품 물고 달려들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영광스럽고 충분히 넉넉한 세상을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입니다. 찬란한 과학 기술보다도 더 위대한 것은 한 송이 꽃의 아름다움이요 신비입니다. 인간의 과학 기술을 다 합해 놓아도 한 송이 꽃의 영광과 신비에 미치지 못합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한 번 보십시오. 하늘은 땅을 위한 선물이고, 땅은 하늘을 위한 선물입니다. 새는 숲을 위한 선물이고, 숲은 새를 위한 선물입니다. 물은 녹색식물을 위한 선물이고, 모든 녹색식물은 모든 생명을 위한 선물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한 선물이고, 자녀는 부모를 위한 선물입니다. 목사는 성도를 위한 선물이고, 성도는 목사를 위한 선물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한 선물이고, 아내는 남편을 위한 선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본래 모든 것을 서로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특별히 사람은 존재 자체로서 훌륭한 선물입니다. 만인이 만인에게 선물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삼라만상이 삼라만상에게 선물입니다. 선물 아닌 것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물론 인생은 고해입니다. 세상의 눈 -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인생은 여전히 힘들고 부족한 것투성이입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보면 인생은 여전히 선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인생의 고해 속에서 선물의식을 다 잃어버리고 삽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물들이 주변에 널려 있는데, 그것을 보지도 못하고 기뻐하지도 못한 채 삽니다.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 하셨는데 우리는 끝없이 염려하며 삽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끝도 없이 염려하며 사는 것입니까? 첫째,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만 내려놓으면 선물을 풀어보는 재미로 기뻐하며 살 수 있는데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선물을 선물로 보지 못한 채 불평하며 사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사실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내일을 염려하면서 오늘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기억하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란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너와 함께 있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거야. 니콜라이야, 바로 이 세 가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란다. 그게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야.”

저는 톨스토이가 말한 것이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 언덕 위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동일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 지금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며 사는 것, 그것이 정말 사는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진정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대부분 내일에 대한 염려 때문에 이 세 가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지 않습니까? 가장 중요한 현재를 놓치고 살지 않습니까? 교실에 앉아 있지만 친구하고 영화 본 생각하고 있는 학생, 밥을 먹고 있지만 눈과 마음은 온통 텔레비전 연속극에 빠져 있는 가족, 산책을 하면서 사업 구상을 하고 있는 사람, 예배를 드리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는 성도들 많지 않습니까?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인 사람들 많지 않습니까? 현재 속에 미래가 들어와 있고 현재 속에 과거가 들어와 있는 사람들 많지 않습니까?

 

우리는 내일에 대한 꿈이 있어야 현재를 잘 살 수 있다고,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살아야 내일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백 번 옳은 말입니다. 내일에 대한 꿈이 있어야 현재를 열심히 살 수 있습니다. 내일을 위해 준비를 해야만 내일의 발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봅시다. 내일의 꿈에 집중하고 몰두해서 내일의 꿈은 이룬다 해도 삶이란 것이 꼭 그 꿈 하나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삶은 단지 결과가 아닙니다. 삶은 과정입니다. 꿈을 성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훨씬 중요합니다. 꿈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 아름답고 행복해야 그게 진짜로 잘 사는 것이지 결과만 좋다고 해서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결과는 찬란했는데 삶은 엉망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루하루를 감사하면서 평화스럽고 행복하게 사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사실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 정현종은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 때 그 일이

노다지였는지도 모르는데…

그 때 그 사람이

그 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는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아! 참으로 아름다운 진실의 언어입니다. 사실 모든 순간은 다 꽃봉오리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할 수만 있다면 모든 순간은 다 꽃봉오리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앞에 충만한 것들로 꽉 채워 놓았습니다. 더 나은 무언가를 찾아 뛰어다닐 필요가 없을 만큼 이미 모든 것이 충만합니다. 다산 정약용이 산에서 지내면서, 일이 없어 사물의 이치를 가만히 살펴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눈에 들어온 사물의 이치는 이러했습니다. “누에가 껍질을 깨고 나오면 뽕잎이 먼저 싹튼다. 제비 새끼가 알에서 나오면 날벌레가 들판에 가득하다. 갓난아이가 태어나 울음을 터트리면 어미의 젖이 분비된다. 하늘은 사물을 낼 때 그 양식도 함께 준다. 어찌 깊이 걱정하고 지나치게 근심하며 허둥지둥 다급하게 오직 잡을 기회를 놓칠까 염려할 것인가?”(정민의 다산어록청상. 24쪽). 그렇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시던 주님 말씀 그대로입니다(마6:31).

 

우리 인생을 보십시오. 우리가 뭔가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실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뭔가를 성취하겠다고 뛰어다니다가 나도 죽이고 너도 죽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맘 편하게 놀고먹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취를 위해 뛰기 이전에 먼저 존재의 충만함을 알아야 한다 이야기입니다. 부족한 것을 보기 이전에 먼저 받은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내일을 두려워하고 염려하기 이전에 먼저 생명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을 신뢰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생명을 주신 분이 생명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신뢰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신뢰가 굳건할 때 우리는 내일을 염려하기보다는 주어진 오늘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삶의 관건은 능력이 아닙니다. 신뢰입니다. 세상은 능력을 요구하지만 능력에 근거한 삶으로는 삶이 피어나기 어렵습니다. 능력보다는 신뢰에 근거한 삶을 살아야만 제대로 된 삶, 감사와 평화가 깃드는 삶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을 충만하게 하는 길은 능력이 아니라 신뢰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과 사랑을 신뢰하는 것만이 삶을 충만하게 살 수 있는 최상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