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창골산 봉서방

십자가

새벽지기1 2015. 11. 28. 07:49

 

 

1.배경
헬라어'스타우로스'는 동사 '히스테미'(어근은 '세우다'라는 뜻)에서 온 것이며, 본래 '수직 버팀대' 또는 "말뚝"을 뜻하였다. 범죄자는 말뚝에 매이거나 말뚝에 질러 꿰는 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들어와 '스타우로스'는 땅에 박은 말뚝을 뜻했으며 그 위에 "T"자 형으로 횡대가 가설되었다. 그러므로 "십자가"란 말은 이 횡대만을 뜻할 때가 있다.

십자가 처형 방법은 동양에서 기원하였다. 그리고 페르샤인들로부터 이 방법을 배워 온 자는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이었다. 그후 로마인들은 카르타고(Carthage)의 페니키아인들을 통해 이 방법을 배웠으며 사형 방법으로 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노예, 도적, 암살자, 등속 및 반란을 일으킨 속주민에게만 십자가형을 실시하였다. 그러므로 로마시민이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경우는 극히 희소했다(Cicero,In Ver 1. 5. 66).따라서 바울이 참수형에 처해졌던 반면 베드로는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보도하는 전승은 로마인들이 민중의 등급을 서로 구별한 관례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라 하겠다.

사형수는 언도가 내려지자마자 쇠나 돌이 붙어 있는 가죽 채찍으로 심한 매질을 당했으며, 이 때 이미 빈사상태에 빠졌다. 그 다음 사형수는 횡대를 어깨에 메고 이를 처형장소까지 운반하여야 하였다(Plutarch, De Ser. Num. Vind, 9.554 A). 사형수는 죄명을 기록한 판을 목에 걸고 있었으며 처형지에서는 옷을 전부 벗어야 하였다. 그리고 기존하는 말뚝 위에 새로 가설한 횡대 위에 처형관들은 사형수를 매어 놓거나 못박았다. 십자가 형틀에는 버팀대가 가설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사형수가 팔에 가해지는 압박을 덜기 위하여 앉을 수 있는 의자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군인들이 사형수의 다리를 꺾음으로써 죽음을 재촉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죽음은 서서히 진행되기 마련이었다(요19:31).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팔레스틴에 있어서 십자가 처형은 일상 다반사였다고 한다(Antiq. 17. 10. 10:2.5.2: Wars, 2.12.6,13.2,14.9:15.1.1). 두 명의 도적이 예루살렘에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졌다는 사실은 바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로마인들과는 달리 산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형수에 대한 형벌을 강화하고 사형수에게 공개적인 창피를 주기 위하여 그의 시체를 나무 위에 매달아 놓을 때가 많았다(민25:4, 수10:26, 삼상 31:30). 또한 유대인들은 이렇게 나무에 매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생각하였다(신21:2223).

그러므로 십자가 처형은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것이었다(고전 1:23, 갈3:13). 이 점은 로마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키케로(Cicero)는 "십자가라는 명칭 자체를 로마 시민의 몸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고 로마 시민의 생각과 눈과 귀에 닿지 않도록 하라" 고 쓴 적이 있다(Pro Rab. 5)


2. 예수의 십자가
헬라어 '스타우로스'가 신약에서 예수에 관해 사용될 때 이는 문자적인 의미와 비유적인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 문자적으로 이 말은 예수를 처형한 도구를 뜻한다. 예수는 심한 채찍질을 당한 후 그 자신의 십자가(엄밀하게는 십자가 횡대, 요 19:17)를 처형지까지 운반하여야 했다. 물론 이 십자가는 무거운 나무토막이 아니었으나 이미 쇠약해진 예수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다(막15:21, 비교. 고후13:4). 그 다음 예수는 십자가 횡대에 못박혔으며 (비교 요20:25), 이미 처형지에 가설되어 있었던 수직 버팀대에 매달리게 되었다(마27:35). 여기서 수직 버팀대에 매달리게 되었다 (마27:35). 여기서 예수는 스스로 예기한 바 있었으나(20:18,19) 도저히 회피할 수 없었던 (막15:32) 죽음을 당하였다.

이러한 문자적 의미를 훨씬 넘어서서 예수의 십자가는 역사와 구속사업의 완성이었다. 십자가는 인간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고전1:18), 즉 인간과 하나님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을 허물어뜨려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또 형제와 더불어 함께 살 수 있게 하고(엡2:16), 만물을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나누는 화평과 조화로 이끌어 가며(골1:20), 인류의 죄를 속죄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죄책감을 느끼게 한 장본인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2:14), 항상 인간을 사로잡고 있었던 악의 우주적 인간을 사로잡고 있었던 악의 우주적 권세로부터 인간을 영원히 해방하기에(2:15) 충분한 강력한 힘을 세상 속에 방출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용하신 수단을 상징한다.

십자가는 범죄자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에게 가해진 것이었으므로, 그것은 인류를 대신하여 예수가 당했던 고난과 수치와 굴욕을 상징하며(히12:2), 가장 악하고 가장 비천한 인간을 들어올리기 위해 그가 기꺼이 짊어지셨던 대속의 행위였다.

또한 예수의 십자가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목적을 표상 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죽음을 예수에게 부여된 최고의 임무로 계획하셨으므로(행2:23, 마16:21, 20:18,19, 요18:11 비교해 보라) 십자가는 이러한 임무의 상징이며,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이 뜻에 대한 예수의 자발적인 복종을 상징하게 되었다(막14:36, 빌2:8)


3. 크리스챤의 십자가
십자가를 지는 일, 십자가는 주를 따르는 자들에게 문자적 및 은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십자가 처형은 팔레스틴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었고 사형수가 그의 십자가를 처형지까지 운반하는 것은 흔히 목격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후예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는 예수의 말씀을 처음에는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하였을 것이다(마16:24,참고 요12:26). 즉 예수의 후예들은 이 말씀을 자기들도 예수와 꼭 같은 물리적 처형 수단을 통하여 죽어야 한다는 것을 예언하는 말로 이해하였다(마23:34). 이러한 예언은 초대 교회의 초기 역사에서 곧 실현되었다(베드로에 대한 십자가 처형 전승과 롬5:3, Hermas, Vis. 3.2.1. 과 비교해 보라).

예수는 또한 그의 제자들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은유적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예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자기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즉 예수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또는 '자기를 보지 말고') 작 십자가를 지고(누가는 여기에 '날마다'라는 말을 첨가하였다). (끊임없이)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막8:34-36). 그러므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을 바친다는 것이 죽이면서 예수에게 끊임없이 충성을 바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지배하거나 결정하거나 욕구를 발현시키는 요소인 자아를 거부하고 또 포기하고 부인해야 한다. 이것은 더 이상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를 생각해서는 안되며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떤 행동을 원하시는가?'를 생각하여야 한다"(George Mac Donald).

만약 예수의 경험에 있어서 십자가가 예수의 임무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십자가는 크리스찬이 부름을 받은 삶의 임무를 뜻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이 부여한 특수한 임무에 헌신하면서 이를 완전하게 수행한 것처럼 예수를 본받는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누가복음 14:27절에 나오는 "자기 십자가"라는 말에 특별히 주목해 보라. 참고 요17:4). 이 때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생활, 즉 기독교적 가르침 아래 살아 가는 생활을 뜻하게 된다.

또한 십자가는 기독교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여야 할 수치와 치욕을 상징한다(히12:2, 13:12, 참고. Ign. Trall. 11:2. Hermas, Vis. 3.2.1). 또한 십자가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일체의 것을 (그것이 바울의 경우처럼 제도화된 종교이든(갈6:14). 이그나티우스의 경우처럼 물질적인 것이든(롬7:2) 파괴해야 함을 뜻한다. 또한 십자가는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신비스러운 합일의 능력을 준다. 이러한 합일의 경지에서는 인간의 옛 죄악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지며, 새로운 희망과 힘이 그의 생활 속에 형성되는 것이다(갈2:19-20, 롬6:6).

기독교인의 십자가는 언제나 자발적인 것이다. 기독교인은 죄수와는 달리 십자가를 지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예수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이라고 말함으로써 자발성을 특별히 강조하였던 것이다(막8:34). 이 구절에는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구속적인 행위를 한다거나 남을 대신하여 저주를 받음으로써 타인의 죄를 속죄한다는 암시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스스로 채운다는 것(골1:24),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과 인간 됨에 관심을 두고 있는 여러 개인들이 계속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그리스도가 시작한 일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한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출 처 : 기독지혜사, "성서대백과" p 753-7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