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3231

가버나움 (막 2: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막 2:1) 나병환자 치유사건 이후로 외딴 곳에 머물러 계시던 예수님은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몰려들던 사람들이 모두 물러간 것인지, 아니면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종교 지도자들이 시비를 걸지 않는다는 확신이 섰는지, 또는 예수님의 고유한 영적인 시각으로 어떤 때를 감지하신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예수님이 사람들의 마을로 들어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게 된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듯이 예수님은 사람들을 피하기는 했지만 다시 사람들 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있어야 할 자리는 자신의 영성을 정화하는 광야, 사막 같은 은둔처가 아니라 민중들이 시끌벅적하게 살아가고 있..

민중 (5) -민중과 한국교회-(막 1: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막 1:45) 세계 신학계에서 민중신학은 “Minjung Theology”라는 고유명사로 불립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삶의 자리”에서 시작된 민중신학은 아직 청년입니다. 앞으로 성숙한 어른으로 자랄지 아니면 열정 청년으로 끝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아무래도 한국교회와의 연관이 중요하게 작용하겠지요. 왜냐하면 신학은 “교회의 기능”이라는 바르트 진술에 따르면 한국교회가 무엇을 요구하는가에 따라서 신학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신자들은 하나님 나라와 연관해서 무엇을 희..

민중 (4) -주체성-(막 1: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막 1:45) 나는 민중 신학자들에게 연대감을 느끼고 있지만 그들에게 민중이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들 때도 있습니다. 여전히 나는 민중 신학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는 전제에서 이렇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민중은 구원의 객체인가, 주체인가? 물론 이런 질문 자체가 우스꽝스러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은 이미 당연한 대답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민중은 구원의 객체이면서 동시에 주체라고 말입니다. 과연 이런 주장이 옳은 걸까요? 일단 민중이 구원의 객체라는 말..

민중 (3) -정체성-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막 1:45)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은 누구일까요? 한국의 대표적 신학이라 할 민중신학의 역사가 최소한 40년은 흘렀지만 민중에 대한 개념 정리는 여전히 모호합니다. 나름으로 개념규정이 나오기는 했지만 아직은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제가 아는 한 그렇습니다. 상식적으로만 말한다면 이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이 민중이겠지요. 마르크스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가 그들이겠지요. 이스라엘의 주류 역사로부터 벗어난 노예, 나그네, 소작농, 장애인, 소수인종, 난치병환자, 여자, 어린아이들, 낮은 계급의 군인 등..

민중 (2) -당파성- (막 1: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막 1:45)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박해받는 계층을 향해서 당파성(Parteilichkeit)을 갖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됩니다. 기존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편적인 것으로 여겼지만 민중신학에서는 그것을 편파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철저한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난 셈입니다. 하나님이 하층민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편든다는 성서적 증언은 많습니다. 구약성서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건이라 할 출애굽은 이집트 사람들의 학정에 눌린 히브리 사람들의 호소가 하늘에 닿았다는 데서 시작..

민중 (1) -한과 욕망-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막 1:45) 뜻하지 않은 일로 인해서 예수님은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고 한적한 곳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사방에서 그에게 몰려왔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 사건은 아무리 한적한 곳으로 퇴각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몰려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빛은 저절로 세상을 밝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엄정하게 말하면 이건 마가복음 기자의 해석일 뿐이지 실제로 그런 건 아닙니다. 예수님과 그의 복음에 대해서 관심을 ..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는 예수 (막 1: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막 1:45)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나병환자였던 이 친구는 콧등으로도 듣지 않고 동네방네 떠들어댔습니다. 내 나병이 다 나았다. 예수가 나를 고쳤다. 뭐 대충 이런 식으로 나팔을 불고 다녔겠지요. 물론 우리는 이 친구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나병 때문에 당한 마음고생, 몸 고생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이제 자신도 떳떳하게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예수님이 아무리 침묵 명령을 내리셨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떠들..

'그들에게 입증하라'(막 1: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막 1:44) 나병이 치료되었으면 그것으로 예수님이 하실 일은 모두 끝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본문에서는 나병환자가 해결해야 할 사무적인 문제까지 예수님이 직접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모든 난치병이 완전히 치유되었다는 증명을 제사장에게서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일일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은 당연히 그런 절차를 밟아야만 했습니다. 45절 말씀을 미리 본다면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웬만큼 말해서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마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옆에서 일러주..

아무에게 아무 말도 (막 1: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막 1:44) 앞서 43절에서 예수님이 이 나병환자에게 엄하게 경고하신 이유가 44,45절에 걸쳐서 설명됩니다. 나병치유 사건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 사람이 지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될 줄 알았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 나병환자의 마음을 우리가 모른 바는 아닙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어떻게 숨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런 일들은 아직 드러날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하고 말씀하셨는데,..

엄한 경고 (막 1:43)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막 1:43) 헬라어 성경에 따르면 이 43절은 44절과 독립적인 문장입니다. 우리말 성경으로 읽는다면 43절과 44절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사만 연결하면 “보내시며, 경고하사, 이르시되”가 됩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으로는 이 동사들이 각각의 문장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루터 성경도 역시 43절에서 예수님이 그를 위협하셨으며, 곧바로 내어 쫓으셨다고 번역한 다음에 44절은 다시 “그리고”로 시작합니다. 제가 여기서 헬라어 성경의 문장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헬라어 성경과 우리말 성경에 뉘앙스의 차이가 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마가복음 기자가 44절을 강조하기 위해서 43절의 말씀을 언급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보통 때..